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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종의 미술 투자] 조형의 새 경지 연 전광영,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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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감각의 영역에 속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전문가의 선택과 시장의 선택이 언제나 일치할 수는 없다. 미술에선 더더욱 그렇다. 누가 훌륭한 미술 작가인지 당장 수치적으로 측정할 방법이 없다. 음악처럼 악보를 보고 연주해 보라고 할 수도 없고, 운동처럼 실기 테스트를 해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대중음악의 전설이 돼버린 서태지만 해도 처음엔 전문가들조차 시큰둥했고, 시장은 열렬히 환호했다. 굳이 고흐나 박수근·이중섭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러한 예는 미술사에도 무수히 많다. 전문가가 훌륭한 작가로 평가했으나 시장이 늦게 반응한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시장 선택의 오류 못지않게 전문가 선택의 오류도 치명적이다.

 2009년 12월 중국 광저우 광둥미술관에서 ‘중국 4대 천황’의 한 명으로 불리는 팡리준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여기서 ‘전 지구적 맥락에서 중국 현대미술의 평가’라는 세미나가 진행됐다. 이 세미나에서 중국의 현대미술 평론가들은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서양의 눈으로 재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중국적 시각과 정서로 평가해야 한다”는 자성의 결의를 했다고 한다. 당시 팡리준의 대규모 회고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기획됐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4대 천황 중 한 명인 왕광이는 자신이 ‘중국의 앤디 워홀’이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 명칭 속에 서양의 가치관과 판단이 담겨 있기 때문이란다. 당분간의 혼란은 불가피하나 자국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당당한 태도다.

전광영의 ‘Aggregation11-DE089’(2011) 202×362cm

 우리의 미술사는 어떠한가. 이우환은 일본의 모노하(物派·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을 통해 사물과 공간·위치·상황·관계 등에 접근하는 예술)의 창시자이자 핵심 이론가다. 누군가가 앞으로 100년은 우려먹을 수 있다고 표현한 백남준은 세계적인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다. 이들의 새로운 미술에 이름을 붙인 사람들은 우리나라 평론가들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발달한 서구 중심의 시각 이론은 아시아의 미술까지 지배했다. 우리는 그들이 정해놓은 장르를 선호하며 그들이 정해놓은 사조에 우리 작가들을 끼워 넣는다. 전시 제목 자체도 한국의 미니멀리즘, 한국의 팝아트 등이 부끄러움 없이 붙여지며 그 장르에 속하는 작가들을 선택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 장르에 속하지 않는 창조적 작업을 하는 우리 작가들에게 한 미술관계자는 “미니멀리즘과 모노크롬도 구별하지 못하는 작품을 한다”고 나무란다. 이쯤 되면 요즘 유행하는 ‘막말’이다. 평론이 작가를 가르치려 드는 것은 개그콘서트 재료로 훌륭한 소재일 뿐이다. 에드 루샤가 평면에 큼직한 글씨로 화폭을 메우면 영감을 주는 창조적 행위라 칭하면서 그 옛날 그림에 화제를 적어 놓은 우리 그림에 대한 평가에는 야박하다. 이야말로 ‘신식민주의적 복종’의 이론적 변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광영은 활자가 적혀 있는 한지로 스티로폼 조각을 싸서 독특한 조형 세계를 열어 보였다. 그는 런던의 애널리 주다 갤러리와 뉴욕의 로버트 밀러 갤러리 같은 최고의 상업 갤러리에 전속된 바 있으며 이미 도쿄의 모리미술관, 베이징의 금일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 2013년에는 비엔나의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예정돼 있는 세계적인 작가다. 홍익대와 필라델피아 대학원에서 수학할 때 누가 그에게 그러한 미술작품을 하라고 가르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독창적이고 새로운 경지를 열었으며,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전시로 이미 세계적인 작가로 각인된 인물이다. 한국 미술의 고질병 중 하나는 시장에서 성공한 작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홀대다. 시장에서의 성공이 훌륭한 작가로의 성장을 가로막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전광영은 상형문자인 한자들을 묶어 새로운 조형의 세계를 열어젖혔다. 아마 일본·중국·미국이었다면 이 정도의 성과를 낸 노화백에게 미술사적인 의미가 부여된 새로운 타이틀을 부여해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전광영에 대해 경청할 가치가 있는 전문가적인 견해를 찾기는 힘든 실정이다. 일흔을 목전에 둔 전광영에게 “예술은 영원하므로 아직 …” 운운하기는 왠지 전문가로서 창피한 일인 듯 싶다. 그는 지금 독일의 쿤스트베르크에서 현대미술계의 전설적 거장 안젤름 키퍼, 독일의 색채화가 고트하르트 그라우브너와 3인전을 열고 있다. 전시회는 9월 16일까지 계속된다. 나는 작가들이 시장에서 인정받아 부를 쌓고 전문가들에게도 인정받아 세계적인 작가가 됐으면 한다. 전문가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노화백의 서운한 얼굴은 내 작품이 잘 팔렸으면 하는 단순한 표정이 아니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젖어 있는 그의 표정을 보니 또 하나의 훌륭한 작가가 우리 손에 의해 새로운 미술 장르를 연 작가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이우환·백남준의 전철을 밟을 것 같다.

서연종 하나은행 삼성역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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