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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에 열심히 응한 게 독 됐다 … 당혹스러운 학교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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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0일 오전 충남의 A고교에선 예정에 없던 교무회의가 열렸다.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응답한 학생 수가 전국 20위 안에 든다’는 언론 보도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등교하자마자 담임에게 뛰어와 사실 여부를 물었다. 교사들도 영문을 몰랐다.

 확인해 보니 실제와는 차이가 있었다. 전교생 중 절반가량이 조사에 응한 탓에 ‘학교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한 학생이 많았다. 하지만 전체 응답자 중 학교폭력을 당한 학생의 비율을 보면 전국 평균(12.3%)과 비슷했다. 이 학교 교감은 “단 한 명의 피해 학생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동감하지만 ‘학교폭력 전국 ○위’ 식으로 학교 이름이 거론되니 어쩔 줄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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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과학기술부의 ‘학교폭력 실태 전수조사’ 공개(20일) 이후 전국 초·중·고교에 ‘후폭풍’이 불고 있다. 학교폭력이 심한 곳으로 부각된 학교들은 “조사에 성실히 응한 대가가 ‘낙인 찍기’”라며 반발했다. 학교 현장과 관련 단체에선 “학교폭력이 심한 학교는 조사에 제대로 응하지 않아 오히려 빠져나갔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 실태조사는 공개를 원칙으로 하되 제대로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조사에서 ‘학교폭력을 당했다’ ‘학교에 일진이 있다’는 응답이 많은 것으로 나온 학교들은 대개 설문 회수율이 높았던 곳이다. 충북의 B고교는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비율은 전체 학생 중 6% 수준이다. 하지만 전교생의 약 80%가 참여해 피해 응답자 수(68명)가 많았다. 이 학교 교감은 “사소한 폭력도 미리 예방하자는 뜻은 좋지만 섣부른 공개로 아이들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힐까 봐 걱정”이라고 밝혔다.

 ‘조사에 협조할수록 손해’라는 자조 섞인 반응도 나온다. 학교폭력 피해 응답 학생의 수가 ‘전국 1위’로 나타난 서울 C초교는 다른 학교와 달리 우편조사를 하지 않았다. 학생 등교일에 맞춰 직접 조사를 진행했다. 덕분에 설문 회수율이 90%에 가까웠다. 이 학교 교사는 “적극적으로 협조한 결과가 오히려 ‘독(毒)’이 됐다”고 씁쓸해했다.

 반면에 최근 학교폭력이 문제가 된 학교의 설문 회수율은 높지 않았다. 16일 급우의 괴롭힘에 못 이겨 자살한 중학생 이모(15)군이 다닌 경북 영주시의 Y중은 회수율이 8.2%에 불과했다. 지난해 12월 학교폭력으로 목숨을 끊은 중학생 권모(당시 14세)군이 다녔던 대구 D중도 16.2%에 그쳤다.

 그 때문에 실상이 알려지길 두려워한 학교일수록 조사에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신순갑 학교폭력대책범국민연대 사무총장은 “몇몇 교장은 공공연하게 ‘사실대로 써봐야 득이 될 게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교과부도 이 같은 상황을 파악한 상태다. 교과부 관계자는 “단 한 명의 폭력 피해자가 있어도 학교가 진상을 조사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응답률이 10%에 못 미친 학교에 대해서는 1개월 안에 재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교과부가 실적에 급급해 성급하게 자료를 공개해 혼란을 부추겼다”며 “방법을 보완해 공개 방침을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종기 청소년폭력예방재단 명예이사장은 “학교폭력이 되풀이되는 것은 학교가 사실을 숨기려는 소극적인 태도로 나오는 게 큰 원인”이라며 “구체적인 정보 공개가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건찬 학교폭력예방센터 사무총장은 “학교별 설문 회수율을 높이고 ‘일진’ 등 모호한 용어를 줄여 명확한 설문을 만들어 결과를 공개한다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한길·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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