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같은 것을 탐냈을까-Competitive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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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호 32면

아이에게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다. 놀이방에서 만난 친구다. 아이의 엄마는 신기하기만 하다. 아이에게 가족이 아닌 사람 중에 처음으로 좋아하는 이가 생긴 것이다. 아이나 어른 모두 인간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려고 한다. 나에게서 기쁨을 얻는다면 그는 내 곁을 떠날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아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친구에게 건네준다. 엄마에게 선물로 받았을 때 자신이 느꼈던 기쁨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부엌에서 일하고 있던 아이의 엄마는 깜짝 놀란다. 방에서 친구와 다정하게 놀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무슨 일일까? 아이는 자신의 장난감을 부여잡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옆에 있는 친구도 영문을 모른 채 같이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당혹스럽게 바라보고만 있다.

강신주의 감정 수업 <10> 경쟁심, 혹은 사랑의 슬픈 변주곡

도대체 아이는 왜 자신이 줬던 장난감을 친구에게서 다시 빼앗아 품에 안고 절망스럽게 울고 있는 것일까? 아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의문은 어렵지 않게 풀린다. 아이는 친구가 자신을 좋아하기를 갈망했다. 그렇지만 친구가 자신이 건네준 장난감에 온 신경을 쏟게 되자 아이는 절망하게 된 것이다. 친구는 자신이 아닌 장난감을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이 순간 아이는 장난감과 묘한 경쟁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내가 좋아? 아니면 장난감이 좋아? 하지만 장난감은 바로 자기 것 아닌가, 그러니 다시 장난감을 빼앗을 수밖에. 불행히도 그 순간은 친구에게서 기쁨을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원래 친구를 기쁘게 하려고 장난감을 준 것이니 말이다.

토니 모리슨이 소설 『술라(Sula)』에서 넬과 술라라는 두 흑인 여성의 사랑을 통해 고민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어렸을 적 은밀한 경험까지 공유하던 단짝친구 술라가 마을에 다시 돌아오자 일이 벌어졌다. 넬은 술라가 자신의 남편 주드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남편 주드는 넬을 두고 마을을 떠나버린다. 상처받은 넬은 술라를 몹시 미워하게 된다. 10년 전 자신의 결혼식을 축하하며 들러리가 되어주었던 술라. 그녀가 어떻게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술라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뒤 넬은 마침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은 주드도 다른 사람도 아닌 술라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동안 내내 난 떠나간 주드를 그리워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상실감이 그녀의 가슴에 밀려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우린 둘 다 소녀였지.” 그녀는 마치 무엇을 설명하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오 하나님, 술라야.” 그녀는 울부짖었다. “이 계집애야, 이 계집애야, 이 계집애야!” 그것은 크고 긴, 한바탕 멋진 울음이었다. 그러나 그 울음은 밑도 끝도 없는 그저 슬픔의 둥근 원, 원들이었다.

지금 읽은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넬이 자신의 곁을 영원히 떠나버린 술라를 그리워하며 절규하는 대목이다. 넬은 너무나 뒤늦게 자신이 진짜 아끼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결국 주드라는 남자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던 한 편의 비극은 서로를 갈망하는 두 흑인 여성 사이의 애정 때문이었던 셈이다. 스피노자는 경쟁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던 적이 있다.

“경쟁심이란 타인이 어떤 사물에 대해 욕망을 가진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에티카(Ethica)』
그렇지만 여기서의 타인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좋아하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을 똑같이 욕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이것은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욕망하는 것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가 상큼한 단발머리를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긴 머리를 자를 것이다. 그가 브람스를 좋아한다면 내 MP3에서 브람스가 흘러나올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언뜻 보면 소꿉친구 넬과 술라는 주드라는 남자를 놓고 경쟁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친구 사이였다. “즉 한 남자아이와 둘 다 입맞춤을 해보고는 한 사람에겐 어떤 식으로 했고 다른 사람에겐 어떤 식으로 했는지 등을 비교했다.” 주드는 두 사람에게 잘해야 장난감과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있었던 쪽이 술라였다면 넬은 주드가 떠나고 또 술라마저 이 세상을 등질 때 비로소 알게 된다.

하지만 넬도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내면의 진실이 아주 때늦게 찾아왔다는 것, 이것이 넬에게는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점에서 넬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으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 아닐까?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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