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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선거, 그리고 우리의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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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어원적으로 정치는 공동체(polity)의 일(ics)을 뜻한다. 즉 국가의 공적 일을 말한다.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는 인간이 출생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가 정치를 피해 간다고 해서 정치가 우리를 피해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 세세한 예산 배분은 물론 육아·교육·복지·주택·연금·금리·환율·환경 정책을 포함해 내 삶의 공적 영역은 늘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개인적 삶의 공적 성격과 결정을 말한다.

 공동체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인 것이다. 만약 내가 정치를 멀리한다면 거꾸로 정치는 내 삶을 더욱 강하게 규정한다. 왜냐하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가 속한 공동체의 정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치를 멀리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이 내 삶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삶의 주체에서 피동체로 전락하게 된다. 내 삶을 좌우하는 공동체의 문제에 나의 참여가 필수적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격렬한 공방전을 전개한 19대 총선이 끝났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낙선자에게 위로를 보내며 금번 총선이 우리 공동체에 남긴 과제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한다. 특정 정당의 승리와 패배를 넘어 공동체 성원으로서 함께 깊이 사려해야 할 점들을 짚어 보자.

 가장 먼저는 너무 낮은 투표율이다. 이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방치해서는 공동체의 공적 결정이 갖는 전체성과 합의성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저락하고 있다. 50% 이하를 기록한 18대 총선은 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절반을 간신히 넘긴 금번 선거도 대표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실제로 한국의 투표율은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 수준이다. 2000년 이후 10년 동안의 평균 투표율은 56.9%로서 90%대를 넘는 호주·룩셈부르크·벨기에는 말할 필요도 없고, 71.4%에 달하는 OECD 평균과도 비교조차 안 된다.

 혁명이 아니라면 투표는 정책변화 압력을 위한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불평등·재벌·비정규직·등록금·육아·복지·연금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분명 ‘낮은 투표참여’-‘낮은 책임추궁’-‘낮은 정책변화 압력’에 직결되어 있다. 특히 20~30세대를 포함한 청년세대의 계속되는 저투표율은 그들 삶이 직면한 숱한 문제를 장년-노년세대의 선택에 맡기는 것과 다름없다. 이 점은 ‘계층 불평등’ 못지않은 한국사회의 ‘세대 불평등’을 미래에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어둡고도 두려운 징표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청년이 반드시 자기 삶의 공적 성격을 깨닫고, ‘공적 계기’에 눈을 뜨길 소망한다.

 선거과정의 문제 역시 짚어야 한다. 특히 선거과정에서 정당의 대변계층이나 집권업적 평가, 정책 차이보다는 몇몇 사건과 인물, 스캔들 중심의 선거보도 및 선거경쟁 과정은 반드시 교정될 필요가 있다. 한두 지역의 후보가 갖는 문제를 과도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정부평가, 정당차이, 선거구별 선택, 차기 의회 구성이라는 ‘전체 국가’의 선거라는 본질이 호도·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과 관련하여 몇몇 보수언론의 보도경향은 인물·사안·정당에 따라, 크게 균형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정당들의 정책논쟁에 대한 정부의 개입 역시 중립성을 상실하였음을 물론이다.

 선거과정과 관련하여 꼭 고려해야 할 제도적 요인은 문제 후보에 대한 적절한 여과장치와 기준을 설정하는 문제이다. 일단 선거전쟁으로 돌입하면 정치논리로 인해 특정후보를 사퇴·제명하는 문제는 어려워진다. 일반적으로 선진민주국가의 정치인들은 정치 자체로부터 성장하여 선택된다. 즉 공적 영역에서 늘 검증받으며 공적 활동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나 한국은 정치 자체로부터의 인적 성장이나 충원이 아니라 정치 밖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발탁과 수혈이라는, 매우 반(反)정치적인 동시에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선택된다. 따라서 금번처럼 스포츠, 인터넷방송, 북한인권운동, 청년여성 부문에서 갑자기 발탁된 후보들이 심각한 문제를 드러낼 때 적절한 대처의 절차와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선거후보의 여과장치와 과정, 기준에 대한 합의가 필수적인 시점이다.

 끝으로 선거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의 근본적 전환을 말하고 싶다. 선거는 공동체를 위한 경쟁이다. 누가 공동체를 위해 인민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를 둘러싼, 이른바 ‘공동체를 위한 좋은 갈등’을 말한다. 그러나 현대의 선거는 점점 사익의 쟁투장으로 변전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마키아벨리, 매디슨, 베버 등 지혜로운 사상가와 정치철학자들이 극히 우려하였던 ‘사익을 위한 나쁜 갈등’을 말한다. 한국은 지금 선거의 역할에 대해 ‘좋은 갈등’을 향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