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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백악관 가는 길 백주의 대결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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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진영은 강타를 맞았다. 혹자는 반칙이라고 말할 법도 한 타격이었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평소 온화한 마크 라시콧 몬태나 주지사(共)
까지 부시 진영에 가세해 고어 진영에 맹공을 가했다.

라시콧은 “부통령 진영이 이번 선거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어의 변호사들은 이제 군인들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부시 진영은 민주당이 해외주둔 미군의 부재자 투표를 인정하지 않기 위한 비열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여기에 걸프戰의 영웅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도 가세했다. 그는 ‘매일 위험 속??살아가는 군인들이 약간의 ‘기술적 문제’ 때문에 투표할 수 없는 “오늘은 매우 슬픈 날”이라고 말했다.

부시 진영의 이같은 공격은 영리한 것인가, 아니면 다급한 것인가. 선거일 이래 플로리다州 선거인단 25표를 놓고 벌이는 결정적 싸움에서 부시 진영은 고어 진영에 밀리는 느낌이었다.

지난주 금요일 플로리다州에서 부시는 법정공방과 홍보전 모두에서 지는 것 같았다. 플로리다州 대법원은 부시를 지지하는 캐서린 해리스 플로리다 주무(州務)
장관의 최종 개표결과 인증을 저지했다. 그대로 갔으면 부시가 승리했을 것이다.

美 연방 항소법원도 수작업 재개표가 위헌이라는 부시측의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민주당 지지표가 더 많은 데이드 카운티도 수작업 재개표를 시작하기로 했다. 브로워드 카운티에서는 현지 판사가 선거관리 위원들에게 고어에게 유리할 가능성이 있는 표를 개표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재량권을 부여했다.

‘마이크로소프트 킬러’라는 별명을 가진 데이비드 보이스 변호사와, 언론과의 관계가 좋은 하버드 법대의 헌법학자 로렌스 트라이브 등 고어 진영의 초특급 변호사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재빠르게 대응했다.

어떤 면에서 부시의 역공은 오싹할 정도로 예비선거 때의 선거운동을 상기시킨다. 부시는 1999년 가을까지 승리를 장담하면서도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등 후보지명을 위한 노력을 가시화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뉴햄프셔州에서 존 매케인 상원의원(애리조나州)
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정신을 차린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州 예비선거에서 이전투구식의 비열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지난 주말 고어에 대한 부시의 역공은 매케인에게 맹공을 퍼붓던 때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예비선거 때 부시는 주로 대리인들을 통해 베트남전의 영웅 매케인의 인격에 대해 전면 공격을 가했다.

부시의 막후 참모로 사우스캐롤라이나州 공략을 이끌었던 워런 톰킨스가 재등장한 것은 우연치고는 참 흥미롭다. 톰킨스는 지난주 플로리다 주도(州都)
탤러해시에 머물며 미군 부재자 투표를 불인정하려는 고어측에 대한 역공을 거들었다.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갈수록 강경하고 노회하게 나오는 쪽은 고어 진영 같았다. 고어측 변호사들은 탤러해시의 한 조그만 법률사무소에서(그것도 초고속 T1 라인을 지난주에야 비로소 깔고)
자신들의 전문분야인 ‘법률의 유리한 해석’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 전문가는 도넛으로 아침식사를 때우고 타이핑과 복사를 손수 해가며 무정부 상태로 치닫는 플로리다州 선거제도의 혼란 속에서 고어의 승리를 낚기 위해 매진했다. 어떤 점에서 민주당은 자기네 텃밭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 재판전문 변호사들은 소송을 제기하고 거기서 이기는 데는 도사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저열한 홍보전에서 민주당은 고어 특유의 대응방식을 답습하는 것 같았다. 가차없이 밀어붙이고,(행동은 당파적으로 할지언정)
말은 도덕적으로 들리게 하며, 결코 머뭇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텍사스州 목장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는 부시는 이상하리만큼 맥빠져 보였다. 그러나 부시는 이미 후보 지명전과 선거를 통해 느긋하게 행동하다가도 갑자기 공세로 돌아서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지난주 토요일 밤 기계식 검표가 끝나고 해외부재자 투표 개표문제가 불투명한 가운데 부시는 고어를 9백30표 앞섰다. 고어 진영은 거의 더블스코어로 고어 지지표가 쏟아져나온 카운티들의 약 1백50만 표에 대한 재개표를 통해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고어 지지표는 초반 개표 때 조금씩 나올 뿐이어서 일부 참모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새 표를 더해도 과연 과반수를 넘을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양 진영은 개표 결과가 더 심한 혼란으로 이어지고 어쩌면 결국 하원 표결에 의해 결판날지도 모르는 경우의 전략과 시나리오를 숙고하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한쪽이 패배를 시인하고 사태를 종결해야 할 것이다. 미국인들은 아직까지는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 뉴스위크 여론조사에서 플로리다 사태를 ‘위기’로 보는 미국인은 전체의 12%에 불과했다.

미국인의 3분의 2가 TV 방송국들이 사태를 실제보다 더 큰 위기로 부풀린 것으로 생각했다. 플로리다 사태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은 그저 호기심으로 즐기는 차원이었다. 많은 케이블 TV 시청자들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관련방송을 쿠바 소년 엘리안 곤살레스 사건보다는 흥미롭고 O.J. 심슨 재판보다는 덜 재미있는 사건쯤으로 여긴다.

인기 연속극이 으레 그렇듯 이 정치 드라마에도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각종 막후공작이 판친다. 두 후보 모두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강조했지만 양 진영의 참모들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다.

플로리다는 평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용과 공격적 정치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지난주에는 그 두 가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팜비치 포스트紙의 엘리엇 클라인버그 기자는 “플로리다에서는 이상한 일이 워낙 많이 일어나 사람들이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간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도 놀랍지 않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 정치 드라마의 주역인 캐서린 해리스 플로리다 주무장관은 富와 권력, 가족간의 갈등을 주제로 한 TV 연속극 ‘다이내스티’의 세트에서 걸어나온 사람 같았다. 언제나 짙은 화장에 세련된 보석 치장을 하는 해리스는 다분히 형식적이던 주무장관직을 일종의 문화사절로 바꿔놓았다.

그녀는 언젠가 플로리다를 ‘중남미의 홍콩’으로 탈바꿈시키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지 언론으로부터 ‘공금으로 호화여행을 한다’는 비난을 받은 해리스는(임기 첫 2년 동안 여행경비로 10만 달러 이상을 썼다)
정치적 야심과 강경한 태도로 유명하다. 그녀는 부시가 승리할 경우 새 정부의 대사 자리에 “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그녀를 ‘부시의 환심을 사려는 아첨꾼’으로 몰아붙이며 조롱했다. 기자들에게 배부된 해리스의 배경에 대한 3쪽짜리 자료에는 그녀가 부시-체니 선거운동의 플로리다 공동본부장이며 부시를 위해 뉴햄프셔州까지 가서 선거운동을 했다고 돼 있다.

고어의 대변인 크리스 리헤인은 그녀를 ‘당리만 챙기는 아마추어 정치인’, ‘공산당 통제위원’이라고 불렀다. 민주당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플로리다에 파견된 하버드 법대 교수 앨런 더쇼위츠는 해리스를 ‘사기꾼’으로 규정했고 클린턴의 前 보좌관 폴 베갈라는 그녀가 영화에 나오는 강아지 납치범 같다고 말했다.

해리스는 자신을 소용돌이에 휘말린 외롭고 단호한 인물로 부각시켰다. 해리스의 한 고문은 “그녀는 자신의 결정이 초래할 역사적 결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해리스는 한 보좌관에게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비난받게 돼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이 결정과 관련해 자신의 상관인 제브 부시 주지사와 의논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해리스는 수작업 재검표 진행을 허용할 것인지, 자신의 법적 ‘재량권’을 행사해 최종 선거결과를 인증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보좌관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공익(公益)
과 당리(黨利)
사이의 갈등은 공화당 인사들만 겪는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당은 해리스가 부시의 간판 선거운동원 노릇을 한다고 비난했지만 플로리다州 검찰총장이자 고어 진영의 플로리다 선거운동본부장인 밥 버터워스는 고어의 선거운동에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다(적어도 공화당은 그렇게 주장한다)
. 해리스 휘하의 州관리 한 명이 각 카운티의 선관위는 수작업 재검표를 실시할 법적 권한이 없다는 판결을 내리자 버터워스는 그럴 권한이 있다는 공문으로 맞섰다.

볼루시아 카운티의 마이클 맥더모트 판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버터워스 검찰총장이 볼루시아 카운티 선관위에 전화했을 때 그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말했다.

맥더모트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에게 전화를 거는 것인?굅?묻자 버터워스는 “플로리다州 검찰총장으로서”라고 대답했다. 맥더모트는 그에게 곧 “고어의 플로리다州 선거운동본부장”도 겸하고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맥더모트는 “그랬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버터워스의 대답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고 말했다.

개중에는 당파 싸움의 차원을 초월한 듯한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 팜비치 카운티의 조지 라바가 판사는 재검표 관련문제 중 가장 골치 아픈 사안 하나를 떠맡았다. 팜비치 카운티의 투표용지 중에는 ‘채드’(펀치 천공조각)
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고 매달려 있거나, 아예 찢기지도 않은 채 자국만 난 것이 많았다.

이렇게 ‘보조개가 파인’ 채드나 ‘배가 볼록한’ 채드를 유효표로 인정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라바가가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리면 민주당의 텃밭인 팜비치에서 더 많은 득표를 할 것이 뻔한 고어를 돕는 셈이다. 라바가는 1994년 주지사 선거 때 제브 부시를 위해 10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모금한 인물이다. 그러나 팜비치 카운티가 ‘보조개’ 투표용지를 유효표로 인정하도록 허용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민주당은 즉시 라바가를 용기있는 인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의 판결은 지난주 내내 갈피를 잡지 못하던 재검표 문제의 혼란성과 모순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공화당은 어떤 새로운 기준도 제공받지 못한 검표원들은 유권자의 의도를 판단하기 위해 모든 투표용지의 채드를 하나하나 검토해야 할 것이라는 반론을 폈다.

한편 당시 팜비치 인근의 브로워드 카운티에서는 두 모서리가 찢겨나간 채드까지만 유효표로 인정하고 있었다. 팜비치에서는 유효표로 처리될 표가 그곳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셈이었다. 브로워드 카운티의 한 판사는 지난 주말께야 좀더 포용력이 큰 ‘보조개 채드’ 기준을 채택했다.

고어-리버먼 캠페인 스티커를 자신의 차에 붙이고 다니는 州행정관 캐럴 로버츠(64)
는 수작업 재검표를 중단하라는 해리스의 명령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면 ‘감옥에 가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팜비치 카운티에서는 지난주 내내 분노한 노인들과 노조 운동가들, 그리고 남부동맹 기를 흔들어대는 극소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뒤범벅이 돼 시위를 벌이고 TV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다. “보조개는 아기들의 볼에나 파이는 것이지 ‘보조개가 파인 채드’가 웬말이냐!”고 쓰인 플래카드도 눈에 띄었다.

민주당은 공화당에 비해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체로 잘 대처하는 것 같았다. 매사추세츠州의 민주당 지도부는 수십 명의 노련한 정치 전문가들을 팜비치에 파견했다. 공화당이 운영하는 카운티 공공건물에 사무실을 얻지 못한 그들은 낡은 이동주택 차량에 사무실을 열었다. 민주당의 큰 수확은 미국 최고의 재판 변호사로 꼽히는 데이비드 보이스를 영입한 것이다.

美 법무부의 對 마이크로소프트 소송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 보이스는 지난주 이 법정 저 법정 뛰어다니며 고어의 입장을 대변하고 부시측 주장에 반론을 폈다. 다이어트 식품업계의 제왕이자 민주당의 거물급 기부자인 대니얼 에이브러햄 슬림패스트社 회장은 민주당 법률팀의 기동성을 위해 개인 제트기를 제공했다.

선거운동 때 ‘민주당 진영 조사팀’을 이끌어온 바버라 컴스탁은 공화당 전국위원회의 비좁은 사무실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고어 진영을 지켜봤다. 컴스탁과 그녀의 조사팀은 선거운동기간 내내 언론에 고어의 과장된 주장과 ‘거짓말’ 사례를 기록한 e메일을 보냈다.

컴스탁 팀은 고어가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심는 데 어느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고 부시 진영에 좀더 열심히 싸울 것을 독려했다. 그러나 오스틴의 선거운동본부는 이 조언들에 코방귀를 뀌었고 플로리다州에서 고어가 격렬하게 도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대응하는 것 같지 않았다.

부시는 선거 후 이틀이 지난 9일에서야 비로소 자기 진영의 최고 변호사 시어도어 올슨을 플로리다에 파견했다.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을 담당했던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의 절친한 친구인 올슨은 워싱턴의 당파적 법률투쟁으로 단련된 베테랑이다. 올슨이 이 싸움에 뛰어들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는 연방법원에 수작업 재검표 금지처분 신청을 했지만 이길 확률은 낮았다. 연방법원은 대체로 투표용지 검표 등 선거관련 문제에 관해 州법원에 앞서 판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주 중반 피로에 찌든 올슨은 워싱턴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갈아 입을 옷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州의 몇몇 공화당원들은 낙심했다. 팜비치 카운티의 리브 브라이트 공화당 최고 법률고문은 “물론 좌절감이 든다. 그들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민주당원들과는 달리 공화당원들은 적극공세도 펴지 않고 있으며 공화당이 근소한 차로 이긴 카운티에서도 수작업 재검표를 요청하지 않아 득표수를 늘릴 기회를 놓쳤다고 불평했다. 브라이트는 연방법원에 수검표 중단을 청원한 공화당의 조치가 너무 미온적이고 시기도 늦었다고 주장했다.

브라이트는 플로리다 선거관리위원 3명 중 하나인 캐럴 로버츠가 빌 넬슨 민주당 상원의원 후보의 선거자금을 모금해 왔다는 증거를 입수했다. 로버츠가 플로리다의 한 사업가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로버츠 자신이 넬슨의 정치자금 모금 파티를 주최하게 돼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미국 지방선거법에는 선거관리위원이 자신이 감독해야 할지 모르는 선거에서 ‘열성 선거운동원’이 되는 것을 막는 조항이 있다.

브라이트는 로버츠의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 법정소송을 불사하려 했다. 그러나 탤러해시의 공화당 법률 지도부가 반대했다. 야비한 행위로 비칠 것이 두려워서였다고 브라이트는 말했다. 그는 “플로리다는 지금 사냥감이 돼버렸다. 이럴 때는 노획물이 어디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획물'(표)
의 쟁취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리고 얼마나 힘들지는 후보들의 의지에 달렸다. 고어 진영의 한 간부는 “강경파 중에서도 가장 강경한 사람이 바로 고어와 리버먼 두 후보”라고 말했다. 지난주 일부러 부인들을 대동하고 영화를 보러 간 그 두 사람은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고어는 부통령 사저 식당을 전쟁 사령부로 바꿨다.

11월 16일 그는 도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선수를 쳤다. 고어는 뉴욕 타임스紙 사설면을 정독하는데 이 신문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플로리다 전역에서 재검표를 실시하고 두 후보가 만나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고어는 밤 뉴스에 출연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부시가 플로리다 전역의 재검표 결과를 수용하기로 하면 모든 소송을 취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또 부시에게 선의의 면담을 요청하면서 정치인다운 유연성을 보이려고 애썼다. 이 제안은 고어가 오랫동안 써온 책략이었다. 고어는 합리적인 듯하지만 상대가 거절할 것이 뻔한 제안을 자주 내놓는다.

텍사스에 있던 부시는 고어의 제안에 몹시 놀란 것 같았다. 그는 목장에서 지내다가 취재진을 만나기 위해 오스틴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어의 제안을 일축한 뒤 목장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은 부시 가족이 “될 운명이라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침착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일인 11월 7일 밤 한 기자가 부시에게 이번 선거에 운명이 달려 있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그는 곧 “선거에서 지더라도 다른 운명이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는 패배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겉보기로는 그렇지만 사실은 달랐다. 고어측의 공세가 잠시 주춤하자 부시측은 반격에 나섰다. 지난주 토요일 법률가들은 논쟁을 멈추고 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시합인 플로리다大와 플로리다 주립大 간의 미식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

한편 부시의 선거운동본부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17일 부시 진영은 5쪽짜리 편지를 입수했다. 이 편지는 고어측 변호사가 초안을 잡은 것으로 군인들의 부재자 투표에 이의를 제기하는 법을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미군 기지에서 보내는 편지들은 소인이 찍히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표들은 대부분 무효처리됐다.

부시측 참모들은 해외주둔 군인이 많은 듀발 카운티에서 부재자 투표 결과 보고가 늦어지자 민주당이 장난을 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부시의 지지표가 오전의 예상치보다 훨씬 적게 나오자 부시 진영은 반격에 나섰다. 라시콧 몬태나 주지사가 선봉에 섰다. 토요일 오후, 군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민주당을 맹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선거운동본부로 돌아오는 그에게 부시측 보좌관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부시와 라시콧은 친한 사이라서 둘은 금요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 도중 선거방해의 증거를 대중에게 공개하라고 부시를 부추긴 사람이 바로 라시콧이었다. 그러자 부시는 한 보좌관에게 말했다. “왜 그를 진작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나?” 부시 정부가 들어선다면 라시콧은 고위직에 임명될 것 같다.

지난주 여러 접전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투는 하나같이 논란의 여지가 많았고 선거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플로리다州 대법원은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세 카운티에서 수작업 재검표를 중단하려는 과정에서 해리스 주무장관이 ‘재량권’을 남용했는지 여부를 밝히기 위한 심리를 열기로 했다. 플로리다州 대법원은 모두 민주당에서 임명한 대법관들로 구성돼 있어 고어에게 호의적인 것 같다.

보이스 변호사는 대법관들이 수작업 재검표를 인정할 것이 거의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관들은 수작업 재검표 과정을 지켜보고 나서 판결을 내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만일 작업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불공정한 것 같으면 수작업 재검표 결과를 무효화하거나 아예 플로리다 전역의 재검표를 명령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들 세 카운티의 재검표가 당초 예상대로 6∼10일이 걸리는 대신 몇 주가 걸릴 수도 있다는 조짐이 보인다. 이 지역의 재검표 작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민주당은 공화당원들이 의도적으로 재검표를 지연시키는가 하면 결과가 조작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경찰을 재검표 현장에 파견해 바닥에 떨어진 투표용지의 채드를 쓸게 하는 등 시선을 끄는 행동을 하고 있다면서 공화당 진영을 비난했다. 마이애미-데이드에서는 65만4천 표를 재검표하는 데 2∼4주가 걸릴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밖에도 문제는 많다. 지난주 마이애미 헤럴드는 마이애미-데이드와 브로워드 카운티에서 중범죄 죄수 39명이 불법으로 부재자 투표를 했다고 보도했다. 그들 대부분이 민주당을 찍었다. 마이애미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코카인 거래로 15년 형을 살고 있는 한 여성(50)
은 자신이 투표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투표 참관인 역할도 했다고 말했다.

민주당원들은 공화당 州관리들이 부당하게 부재자 투표 기표를 도왔다고 비난하고, 케어런 휴스 부시측 대변인은 민주당이 득표수를 왜곡하고 재검표 작업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플로리다州 대법원이 그런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해도 패자는 연방 대법원에 항소할 수 있다. 연방 대법원은 州법원의 결정을 뒤집으려 하지 않겠지만 미국 대통령이 완전히 불공정한 방법으로 선출됐다고 믿게 되면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체계가 흔들리고 혼란 상태에 빠지면서 플로리다의 선거인단 선출이 12월 18일까지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날은 각 州 선거인단이 투표하는 날이다. 만일 그때까지도 선거인단이 선출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플로리다 州의회가 개입할 것인가, 아니면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출이 하원으로 넘어갈 것인가.

워싱턴의 구세대 정치인들 중 얼마 남지 않은 현인으로 알려진 로이드 커틀러는 “내년 1월 의회가 소집되기 전에 대통령이 선출된다면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 코미디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다들 엉뚱한 소리만 해대고 있다.” 커틀러는 벌써부터 만일 대통령 선거가 의회에서 결말날 경우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려고 법률서적들을 읽고 있다. 물론 의회라고 해서 플로리다州 선거관리위원회보다 절차가 더 질서적이고 공정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결국은 새 미국 대통령이 나올 것이다. 그의 통치기반은 그리 강하지 못하고, 또 우호국과 적국을 포함해 일각에서는 그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합중국은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미국인들은 황당한 정치쇼나 구경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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