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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회 결성, ‘무정부’ 선언한 일본 유학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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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호 26면

코민테른의 창립 초기에 각국 공산당은 러시아 공산당과 동등한 관계였지만 스탈린 시대에 상하관계로 바뀌었다. 사진은 레닌이 코민테른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가 권태균]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② 사회주의 단체 조직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한국에서 식민통치에 대한 전 민족적 저항의 불길이 타오른 다음날인 1919년 3월 2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는 전 세계의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이 집결했다. 제3인터내셔널(Third International), 즉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국제공산당(國際共産黨)이라고도 불렸던 코민테른은 각국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결성된 국제조직이었다.

각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지부로 가입해야 했다. 레닌, 에벨라인(Eberlein·독일), 플라텐(Platten·스위스) 등을 의장단의 상임위원으로 선출한 코민테른 창립대회에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의 21개국 35개 조직을 대표해 총 52명이 출석했는데, 조선 대표도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한인사회당에서 파견한 박진순(朴鎭淳)·박애(朴愛)·이한영(李漢榮) 등이 그들이다. 모스크바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러시아 2세 박진순은 이르쿠츠크파에 맞서 끝까지 이동휘를 지지했는데, 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 한인사회당의 활동을 코민테른에 보고하고 당을 등록했지만 코민테른 조선지부로 승인받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이후 코민테른 가입을 둘러싸고 국내외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각축하는 단서가 열린 셈이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인도 출신의 멕시코 공산당 대표 로이(Roy)가 민족문제를 둘러싸고 레닌과 논쟁했던 것처럼 레닌(1870~1924)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코민테른은 러시아 공산당과 각국 공산당 사이에 명백한 상하관계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1 박열. 흑도회·흑우회 등에서 아나키즘 운동을 주도하다 1923년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해방때까지 22년간 투옥되었다. 2 일본군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한인 아나키스트를 돕던 오스기 사카에 등을 학살했지만 훗날 만주국 영화협회 이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하는 1924년 무렵부터 코민테른의 성격은 심하게 왜곡되기 시작한다. 러시아 공산당의 하부기관으로 사실상 변질되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가공할 물리력에 맞서야 했던 한인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코민테른의 이런 성격 변화보다 코민테른이 한국 혁명운동을 지원하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동휘에게 전달된 이른바 레닌 자금은 이런 경향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인 공산주의 운동사는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상수(常數)로 두어야 할 정도로 그 규정력이 강했다.

코민테른이 가진 권위의 원천은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에 있었다. 드디어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이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정치체제로 다가온 것이었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에서 “러시아 혁명당은 처음으로 붉은 기를 높이 들고 전제(專制)를 뒤엎고 큰 정의를 선포했으며, 각 민족의 자유·자치를 인정했다. 전에 극단적인 침략주의자였던 러시아가 일변하여 극단적인 공화주의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세계 개조(改造)의 제일 첫 번째의 동기가 되었다”라고 극찬했다.

61세의 박은식이 이럴 정도면 젊은 청년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한인 독립군부대가 러시아 적군에게 다수 살상당한 1921년의 자유시 사변으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상해 프랑스조계라는 안전지대를 제공하는 프랑스와 함께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극소수 국가 중 하나였다.

러시아 혁명의 여파는 한국 독립운동계에도 곧바로 밀려왔다. 1918년 4월 28일(러시아력)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 박진순, 김알렉산드라 등이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국내에 사회주의 사상을 먼저 전파한 세력은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일본 경시청 조사에 따르면 1919년 재일 한인 유학생 수는 448명이었다. 1920년 980명, 1921년 1516명, 1922년 1912명으로 급증하지만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조선인 대학살이 발생한 1923년에는 667명으로 급격히 줄었다가 1924년 990명, 1925년 1575명으로 다시 늘어갔다.

유학생들 중에는 부유층 자제도 없지 않았지만 다수는 신문 배달, 행상, 직공일 등을 병행하는 고학생이었다. 주간보다 야간에 다니는 학생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는 학생도 많았고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동거하는 경우도 많았다.

초기 유학생들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시킨 영국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social Darwinism)을 선진이론으로 받아들였다. 스펜서는 인간사회도 생물처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사회진화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불평등을 개인들 사이의 자연적 불평등의 결과로 보면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 보수적 정치이론을 지지했다. 더 나아가 앵글로색슨족이나 아리안족의 민족적 우월성에 대한 이론을 받아들여 제국주의·식민주의·인종주의 정책을 합리화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19세기 말 가토(加藤引之), 도야마(外山正一), 후쿠자와(福澤諭吉) 같은 인물들이 일본에 크게 유행시켰고, 종국에는 정한론(征韓論)을 인정하게 되어 있었다.

한인 유학생들은 사회진화론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이론 구조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사상이 다가온 것이었다. 이때의 사회주의 사상은 아직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코뮤니즘(공산주의)이 분리되기 이전이었다. 1920년 1월 도쿄에서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이하 동우회)는 겉으로는 조선 출신 고학생들의 친목단체였지만 그 내용은 사상단체였다.

동우회는 기관지 동우(同友)를 발간했다. 동우회의 발기인인 김찬(金燦:김낙준), 이기동(李起東), 김약수(金若水), 정태성(鄭泰成), 박열(朴烈), 김사국(金思國), 정태신(鄭泰信:정우영) 등은 이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되었고, 동우회는 재일 한인 사회주의 운동은 물론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중요한 수원지(水源池)가 되었다.

동우회 내부에선 결성 직후 사상·노선투쟁이 발생했다. 아나키즘과 코뮤니즘 사이에서 초기의 대세는 아나키즘이었다. 공산주의의 상징색은 적색(赤色)이고 아나키즘의 상징색은 흑색(黑色)인데 1921년 10월 김약수·박열·김사국·정태성·조봉암·김판권 등의 주도로 결성된 단체의 명칭이 ‘흑도회(黑濤會)’인 것도 아나키즘의 강한 영향력을 말해준다.

일제가 작성한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는 ‘동회(同會:흑도회)는 한국인에 의한 무정부주의 운동의 남상(濫觴:시초)’이라고 전하고 있다. 아나키즘이나 코뮤니즘은 국제주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고립된 성격의 민족주의와는 전파력과 결속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흑도회 결성에 일본인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大衫榮), 이와사 사쿠다로(岩佐作太郞) 등이 함께하는 것도 국제주의 성격을 말해준다.

그런데 오스기 사카에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도쿄 헌병대의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 대위에 의해 동지 이토 노에(伊藤野枝) 및 일곱 살짜리 조카 다치바나 무네카즈(橘宗一)와 함께 학살당하고 시신이 우물에 던져진다. 이른바 아마카스 사건(甘粕事件)이다. 이후 아마카스는 형식적으로 단기 처벌된 후 만주로 건너가 관동군(關東軍)의 특무공작에 종사하면서 만주국 경무사장(警務司長:경찰청장)까지 올랐으니 일제가 주도했던 동아시아 근대사가 얼마나 야만의 세월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흑도회는 결성 직후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김약수 등과 노선 갈등을 겪다가 그해 12월 해체되고 박열·정태성·홍진후 등 아나키스트들은 흑우회(黑友會)를 결성했다. 흑우회는 기관지 강한 조선인(太い朝鮮人)을 발간하는데, 강한(太い:후토이)의 발음이 불령(不逞:후테이)과 비슷하다는 이유였으니 실제 명칭은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과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지가 강했다.

유학생들 사이에서 흑도회는 둘로 나누었지만 동우회라는 틀은 계속 유지했다. 동우회 간부들은 1922년 1월 귀국해서 조선일보(1922년 2월 4일)에 ‘전국 노동자 제군에게 격함’이란 선언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 “우리 동우회는 일본의 주요 사상단체 및 노동단체와 제휴하여 … 고학생 및 노동자의 구제기관임을 버리고 계급투쟁의 직접적 행동기관임을 선언한다”고 주창해 국내의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김약수·김사국·정태신·정태성·박열·원종린 등 12명 명의의 선언문은 드디어 국내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공개적으로 상륙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개량주의적 민족주의의 아성이었던 동아일보는 1922년 2월 11일, 12일, 13일자에 ‘학생 제군(諸君)에게 고하노라’라는 연속 사설을 실어 ‘사회 혁명의 발원은 개성(個性)혁명에 발원한다. 개성혁명은 학생 때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준비론으로 학생들의 조급한 행동전개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그해 3월 31일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를 결성해 조선에 사회주의 세력이 본격 등장했음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