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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문제에 ‘공룡’ 못 쓰는 미국 … 극단으로 가는 정치적 올바름 … 우리는 어디쯤 와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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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가게 주인이 말만 곱게 하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오는 법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피차 손해 볼 것 없는 상황에서 말이 고우면 세상사도 부드러워진다. 몇몇 직업에 대한 호칭도 그래서 바뀌었다. 식모는 가정부, 나아가 가사도우미. 우체부는 집배원, 청소부는 환경미화원, 간호원은 간호사로 바뀌었다. ‘살색’이 ‘살구색’으로 바뀐 경위는 약간 다르다. 살색은 인종에 따라 다르니 정확한 표현이 아닌 데다 세계화·다문화사회에서 인종차별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 많이 고려됐다. 그러고 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중국인·일본인을 비하하는 표현도 주변에서 거의 사라졌다.

 정치적 올바름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어떻게 될까. 지난주 미국 뉴욕포스트지에 재미있는 기사가 났다. 뉴욕시교육청이 ‘공룡’ ‘생일’ ‘핼러윈’ ‘수영장·컴퓨터를 갖춘 집’ ‘테러리즘’ 같은 용어를 시가 주관하는 시험문제에 쓰지 말도록 금지했다는 뉴스다. 학생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다. 공룡은 창조론을 확신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를 불편하게 하고, 생일은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기념하지 않으며, 핼러윈은 이교도 관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영장 있는 집도 가난한 아이들이 언짢아한단다.

 뉴욕시교육청의 조치는 우리에겐 매우 낯설지만 미국 사회를 뒤흔든 커다란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90년대 미국 교육계에 불어닥친 다문화주의 바람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주무기 삼아 제기된 다문화주의 교육론은 1994년 ‘역사표준서’를 둘러싼 공방에서 정점을 이룬다. 다문화주의자들은 인종주의·성차별 등을 철저히 배격했다. 학교 권장도서는 대부분 ‘이미 죽은 유럽계 백인 남성(DWEM)’이 쓴 것이므로 부적절하다고 공격했다. 그러자 학습교재 출판사들도 정치적 올바름을 자체 검열 기준으로 삼아 외모·진화·빈부·임신중절·동물학대 등이 담긴 수많은 용어를 걸러내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에게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험문제 지문에서 땅콩의 영양가 관련 내용이 삭제되기도 했다(‘끝나지 않은 논쟁: 문화전쟁 이후의 미국 교육을 둘러싼 논쟁’, 정경희 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

 미국의 다문화주의 교육론은 많은 반론을 불렀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논쟁의 바탕에 교육철학과 미국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도 요즘 말과 행동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살색이 살구색으로 바뀐 게 불과 10년 전이니 많이 의식할수록 좋을 것이다. 다만 자기 정치적 이익과 권력욕, 특정 정치인에 대한 호오(好惡)를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하는 이들이 너무 들끓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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