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아웃', 너무나 할리우드적인 일본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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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도쿄국제영화제를 보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다. 몇년 전이라면 상상할 수 있었을까? 한국영화가 일본에서 '붐'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쉬리'의 흥행에 힘입어 이번 영화제에 소개된 '단적비연수'와 '텔미썸딩' 그리고 '주유소 습격사건' 등 한국영화가 일본관객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다.

특히 박제현 감독의 '단적비연수'는 강제규 감독이 제작한 탓에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해외 관객들이 영화 상영에 앞서 노숙을 하는 등 뜨거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일본 관객에게 어느 정도 어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에만 블록버스터가 있나? '화이트 아웃'은 일본판 블록버스터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다. '화이트아웃'은 일종의 기상용어. 심한 눈보라 이후 난반사로 인해 주변이 온통 흰빛으로 가득차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영화에서 일본 최대의 댐 오쿠도와의 관리요원 토가시는 조난자를 구조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조난자를 운반하던 도중 지원요청을 위해 토가시 혼자 하산하지만 이후 동료는 시체로 발견된다. 죽은 동료의 약혼자인 치아키가 댐을 방문하고, 같은 날 일군의 테러집단 레드문이 댐을 점령한다. 거액의 현금을 요구하면서 정부와 협상을 하기 위한 것. 홀로 테러집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토가시는 레드문 일당에 맞서 단신으로 댐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화이트 아웃'은 스타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토가시 역의 오다 유지는 얼마전 국내 개봉했던 '춤추는 대수사선', 그리고 치아키 역의 마츠시마 나나코는 '링' 시리즈에서 만난 바 있다. 마츠시마 나나코는 최근 일본에서 '마녀의 조건'이라는 TV드라마로 한창 주가를 높이는 중이기도 하다. 감독인 와카미츠 세츠로는 주로 TV 드라마 연출을 하면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와카미츠 감독은 "영화가 혹한에 촬영된 탓에 배우들에게 매우 미안했다. 강추위로 인한 동상, 그리고 배탈 등으로 어려움이 무척 많은 영화였다"라고 말한다. 감독의 이같은 말은 영화를 직접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최근 일본에서 '화이트 아웃'은 화제를 낳은 바 있다. 할리우드 영화 못지 않게 스케일이 큰 영화이기 때문이다. 과연 실체는 어떨까. '화이트 아웃'은 눈(雪)과 물, 두가지 재앙을 축으로 삼는다. 하얀 눈이 쌓인 공간에서 테러집단은 댐을 폭파시켜 물난리를 내겠노라고 위협한다.

어디선가 본 영화같은데? 이런 생각이 든다면 아마도 '다이하드' 시리즈 탓일 것이다. '화이트 아웃'은 브루스 윌리스 대신 오다 유지라는 스타를 기용해, 테러리스트들에 맞서는 소영웅을 탄생시키고 있다. 스펙터클도 한몫한다. 설원을 질주하면서 오다 유지는 총을 난사하고, 댐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배경으로 악당들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 그런데 조금 볼거리와 템포가 약하다. 테러리스트들에 맞선, 어느 평범한 인물의 일인 액션극은 '다이하드'에서 볼 것을 모두 본 탓이다.

'화이트 아웃'이 인상적인 점은 이 영화가 스케일이 큰 작품임에도 나름의 드라마를 짜맞추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동료를 잃은 토가시는 죄책감으로 내내 괴로워한다. 결말에선 토가시의 불타는 전투력이 실은 동료에 대한 보상심리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둘간의 우정에 대한 잔잔한 묘사가 곁들여지는데 은근히 관객의 정서에 호소하고 있다.

'화이트 아웃'은 1980년대에 '스펙터클'을 전면에 내세운 대작 성향의 일본영화들과는 조금 다르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할리우드적이라는 점이 실망스럽다. '다이하드'의 아류작 이상이 아니란 점에서 '화이트 아웃'은 절반의 실패를 이미 안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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