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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그대로 거기 있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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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나의 종로행이 시작됐다. 친구들과 갔던 종로서적. 예쁜 펜이며 수련장을 몇권 사고 길이라도 잃어버릴세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 첫 경험이었다.

80년대말 고입연합고사를 치르고 맞은 겨울방학. 틈만 나면 종로로 달려가 KFC에 죽치고 앉아 몇시간이고 떠들어대고, 지금은 없어진 웬디스에서 '베이컨치즈포테이토'라는 이름의 통감자구이를 먹었다.

고등학교때, 친구들과 날까지 잡아서 맥도날드를 찾아가 빅맥을 먹었다. '까페출입=날라리'라는 공식이 성립하던 그 시절, 눈치보면서 슬쩍 들어가 작은 목소리로 커피를 시켰다. '뮤직랜드'에서 프로그레시브록 코너를 서성대던 나의 어줍잖은 허영심과 피카디리 옆 건물 지하의 'SM'에서 희귀 뮤직비디오를 즐기던 사치. 학력고사를 본 후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한 영화관. '사랑과 영혼', '유치원에 간 사나이'. '경마장 가는 길'로의 과감한 도전.

그리고 그 주변의 을지로와 무교동 일대.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곳에 남겨둔 추억이 너무 많은 것을. 종로·을지로·무교동 근처에 작은 추억이라도 하나 묻어둔 이들이여. 이번주에는 그 추억을 찾으러 가자.

13:00 영풍문고 건너편 LG화재 빌딩에서

종로와 을지로의 확실한 중간지점에 위치한 LG화재 건물 앞에서 만나자. 이 건물이 어딨냐면, 영풍문고 남쪽 건너편에 있지. (지도 참조)

13:00 - 13:40 이 근처 수많은 밥집 중에 정말 맛난 곳 두 군데

이 동네는 눈에 보이는 식당은 참 많지만 실제로 입에 짝짝 달라붙게 맛있는 음식을 내주는 곳은 별로 없다.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맛집을 알아두는 게 좋다.

첫번째, 맛있는 중국집이 여기 숨었네

LG화재 옆길로 쓱 들어가서 100미터쯤 걸으면 왼쪽에 '삼덕약국'이 있다. 약국옆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골목이 점점 좁아져서 끝나갈 때쯤 빨간색으로 '초류향(楚遊香)'이라 적은 약간 보기드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간판을 지나쳐 몇걸음만 걸으면 오른쪽에 맛난 중국집 '초류향'이 정말로 나타난다. 골목 생김만 보면 이런 길 끝에 중국집이 있을 것 같지 않지만 믿음을 갖고 꿋꿋이 걷다보면 정말 나타난다.

이 집은 이런 구석데기에 숨어있기에는 아까운 집이다. 숨어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나는 알고 왔다, 그러므로 나는 대단해 (우헤헤) 뭐 이런 심리가 실제보다 더 맛있다고 느끼게 하는 게 아니다. 정말 맛있다. 시켜도 후회없을 메뉴는 시원한 삼선누룽지탕·뼈까지 씹어먹는 재미가 그만인 해삼갈비·매콤바삭한 라조기 등이지만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므로 볶음짜장을 먹는다.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짜장으로는 만족할 수 없지 하는 분들은 짜장 하나와 요리 하나를 먹자. 하나만 고른다면 삼선누룽지탕이 좋다.

알음알음으로 소문이 났는지 늘 손님이 있다. 그래도 사무실 밀집지역이라 토요일 오후에는 한가하니 걱정말고 가도 된다. 단, 조금(과연 조금일까?) 지저분하다는 건 알고 가셔야 할 걸.

두번째, 시골된장의 찐한 맛

오직 소고기된장찌개 하나로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을 사로잡는 맛집이 한군데 있다. 그 이름 '산불갈비'. 상호만 보면 갈비전문인 것 같지만 이 집을 3년 넘게 드나든 본 기자, 갈비 먹는 손님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모두 된장찌개를 먹고 있다.

된장은 냄새와 색이 찐한 시골된장이다. 구수하고 짭짤한 것이 입맛없을 때 그만이다. 같이 나오는 풋고추를 어석 한입 베어먹고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밥 위에 얹어 쓱쓱 비벼먹으면 으음~ 행복하다.

평일 점심 때는 몰려드는 주변 직장인들로 줄 서서 먹어야 한다. 12시 5분만 지나면 자리가 없을 정도. 좁은 가게에 탁자와 의자를 많이 들여놓아 편안하고 여유있는 식사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맛 하나만으로 이런 불편쯤은 상쇄되고도 남는다.

LG화재 옆길로 20미터쯤 걷다보면 왼쪽에 '코닥일양칼라현상소'(흔히 말하는 사진관^^)와 '도리방 정종대포집'이 있다. '산불갈비'는 이 두집 사이 골목 안쪽에.

13:40 - 14:00 서울시티투어버스 기다리기

맛난 점심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 들어온 골목 반대방향으로 가면 삼성화재 뒷편으로 나온다. 삼성화재 건물을 끼고 큰길쪽으로 가자. 건너편에 롯데백화점·롯데호텔이 보일 거다. 지하도를 건너서 롯데호텔쪽으로 걷는다. 롯데호텔을 지나쳐 프레지던트 호텔 못 미친 곳에 사진에서 보이는 '시티투어(City Tour) 버스' 정류장 표시 막대기가 있다. 여기서 버스를 기다리자.

14:00 - 16:30 서울 한바퀴 돌기 (인사동 하차)

'시티투어버스'는 서울시에서 10월부터 서비스하고 있는 서울 한바퀴 관광버스다. 탑승료는 1회권 1천2백원, 주간권 5천원. 이 두가지의 차이는, 1회권은 한번 탔다가 중간에 내리면 다시 타고 싶을 때는 또 탑승료를 내야 되는 거고 주간권은 한번만 사면 주간시간(오전 8시~오후 6시) 동안은 몇번을 타고내려도 상관이 없는 거다. (다 아는 건가?) 1회·주간권 외에 오후 6시에서 밤 12시까지 운행하는 야간권(5천원)과 하루종일 이용하는 전일권도 있다.

오늘은 데이트 스케줄상 한번만 타고 내리는 걸로 돼 있으니까 1회권을 사면 되겠지. 몇몇 여행사나 호텔 등지에서 티켓을 팔고 있지만 현금도 받으니까 굳이 티켓을 사러 이리저리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토요일 오후라 차 막힐 것을 감안한다면 전체 3시간 코스정도 된다. 광화문 동화면세점에서 출발해서 '덕수궁→롯데호텔(바로 여기)→북창동→서울역→남대문시장→이태원(해밀턴호텔건너)→크라운호텔내→명동(남산순환로 입구)→남산골한옥마을(매일경제사옥앞)→소피텔 앰버서더호텔앞→타워호텔내→신라호텔→동대문시장→대학로(예총회관)→창경궁→창덕궁→운현궁→인사동(입구 대일빌딩)→조계사→청와대(분수대 정자)→국립민속박물관→경복궁→경찰박물관(서울지방경찰청)→세종문화회관' 코스를 거쳐 다시 광화문 동화면세점으로 돌아온다.

그야말로 서울 강북의 요소요소를 샅샅이 훑는 코스다. 외국에서 온 손님이나 지방에서 온 친척들에게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아주 좋다. 물론 정류장마다 승하차가 가능하니 구경좀 하고 싶은 곳에서는 내렸다가 다음 버스를 타도 된다. 버스정류장의 표시 막대기마다 정차시각이 적혀 있으니까 그걸 봐두면 다음 버스가 올 시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거다.

정류장에 서있다보면 '과연 버스가 오긴 오는 건가' 혹은 '이거 타는 사람 아무도 없는 거 아닌가' 온갖 생각이 교차하지만 분명히 버스는 오고 이용하는 내외국인도 꽤 많다. 버스는 고급 관광버스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그녀와 나란히 앉아 얘기도 나누고 창밖도 보면서 '관광지'로서의 서울을 즐기자.

전구간을 다 돌지는 말고 오늘의 메인 목적지 종로에서 내리자. 굴다리 형태의 낙원상가를 빠져나와 종로쪽 인사동 입구에서 하차하면 된다.

16:30 - 18:00 대한민국산 모든 잡지는 다 모였다

토요일 오후의 종로라... 사람도 많고 차도 빽빽하고 노점상도 넘치고 음악도 시끄럽다. 버스에서 내려 두번 횡단보도를 건너 시사영어사 건물로 향하자. 새로 지은 번쩍번쩍한 시사영어사 건물이 아니라 예전 것, 그러니까 지하에 뮤직랜드가 있는 그 건물이다. 지금은 건물외관을 공사하고 있어서 좀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속에 들어있는 사무실이나 가게들은 모두 영업중이니 걱정말자.

건물 입구에부터 '한국잡지종합전시관'이라는 알림판이 붙어있고 '어디가 어디냐' 헤매지 않게 곳곳에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초록색 간판을 따라서 지하로 내려가, 뮤직랜드를 가로질러 다시 한층 더 내려가면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잡지가 가득 들어차 있는 공간이 나온다. 여기가 바로 '잡지종합전시관'이다.

대한민국에서 발행되는 모든 월간 잡지를 한곳에 모아놓은 곳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월간지는 다 있다. 사보나 협회보 등 무가지, 즉 비매품도 모두 있다. 분류를 하자면 여성·아동·유아·만화·청소년·교육·수험·레저·스포츠·농수축산·교통·관광·종교·건강·산업·환경·경제·과학·기술·생활정보·법률·고시·지역·성인·오락 등등... 아이고 숨차다.

'열혈남아' 류의 잡지를 그녀 몰래 훔쳐보는 그. 음... 어떻게 할까. 공짜니까 저러겠지 하면서 못본 척 해줄까? 에이 모르겠다. 알아서 하시라.

한가지 흠이라면 앉을 공간이 넉넉치 않다는 거다. 마련된 의자에는 한 다섯명정도 앉을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바닥이 깨끗하니까 그냥 편하게 털썩 주저앉아 잡지를 읽어도 무리는 없겠다. 꼭 한번 와볼 만한 곳이다. 서점에서 눈치 보면서 잡지 뒤적이지 않아도 되고. 어떤 잡지가 좋은 지 미리 보고 정기구독 신청해도 좋고.

18:00 - 19:00 종로, 오랜만이군

저녁먹는 시간인 줄 알았지? 오늘은 아니다. 헤헤. 한시간 동안 종로 구경을 하면서 넘치는 노점상에서 계란빵도 사먹고 오뎅도 간장 찍어 먹자. 그러다보면 허기는 좀 가실테고 일곱시부터 영화 한편 보고 그 다음에 한잔 하면서 저녁 대신하면 되지 않을까?

잡지전시관에서 나와서는 길을 건너지 말고 30미터 정도만 걸어서 씨네코아로 가자. 이번 토요일에 개봉하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를 예매하러 가는 거다.

예매를 했으면 이제 종로를 조금 쏘다녀 볼까? 씨네코아에서 길을 건너서 옛날 오카방고 극장 자리(지금은 오카방고 호프) 옆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죽 걷다보면 앞에 그 오래된 '보니 앤 클라이드'가 나온다. 인테리어를 고쳐서 지금은 깔끔·단정해졌지만 상호와 위치만은 그대로다. 보니 앤 클라이드를 보며 옛추억에 잠시 잠기다가 그옆 오락실로 들어가보자.

이 오락실에는 입구부터 '난타2000, 게임기로 출시'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손으로 하는 DDR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재밌는 건 커다란 생수통·도마·냄비 등이 발판을 대신한다는 거다. 노래에 맞춰 다다다다 두두두두 두드리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오락실을 빠져나와서는 코아아트홀쪽으로 향하자. 맥도날드 방향으로 걷다가 영양센터 네거리가 나오면 좌회전. 좌회전해서 들어가다보면 왼쪽에 귀금속 할인매장이 나온다. 종로3·4가의 특화 상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귀금속 할인매장이 여기까지 진출한 셈. 다른 곳보다 금붙이가격이 많이 저렴한 곳이다. 그/그녀와 커플링이라도 하나 나눠끼면 좋을 듯.

귀금속 매장 맞은편 쪽 코너에는 'CD뱅크'가 있다. 여기서는 원하는 곡 일곱개 정도를 골라 나만의 CD를 제작할 수 있다. 자판기나 스티커사진기를 닮은 CD자판기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뽑아내면 CD에 떠준다. 당신과 그/그녀만의 사랑의 컴팩트디스크를 만들어갖자.

CD뱅크 앞 큰길이 종로2가의 중심, 코아아트홀 앞길이다. 약속장소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도 북적북적. 특히 갈 만한 곳은 없다. 코아아트홀 바로 옆의 TTL존 정도에서 인터넷으로 '주말데이트'나 일독해보는 정도? 헤헤.

군것질을 빼놓으면 영화보는 내내 배가 출출하다. 간단하게 우동 한그릇 정도를 나눠 먹어도 되고 분식집에서 만두랑 떡볶이, 오뎅 먹는 것도 재밌지. 어쨌든 꼭 요기는 하자.

19:00 - 21:00 코엔형제, 댁들도 오랜만이군

18시45분이 되면 이제 슬슬 씨네코아로 발길을 돌리자. 코엔형제가 만든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되니까. 솔직히 본 기자, 이 영화 아직 못봐서(제 옆의 영화담당자 김은희씨는 벌써 시사회 갔다왔답니다. 부러워라~) 어떤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코엔형제라는 이름만으로도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마음이 콩닥콩닥... 아닌가요?

중앙일보에 실린 리뷰기사를 한번 보신 후에 극장을 찾으셔도 좋고, 사전정보없이 영화보는 걸 더 좋아한다면 그냥 가도 좋고.

21:00 - 싸고 양 많은 피맛골 주점골목

아홉시가 돼야 영화가 끝난다. 극장을 나서는데 배에서 꾸르륵 꼬로록~ 난리도 아니다.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시라. 인사동쪽의 싸고 양 많은 주점을 찾는 것과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종로1가쪽에 있는 최고의 낙지볶음집을 찾는 것 중 하나.

우선, 인사동의 주점골목은 금강제화 바로 뒤에 있다. 씨네코아에서 타워레코드까지 걸어올라가 횡단보도를 두번 건너면 금강제화가 나온다. 매장 바로 뒤에 있는 좁은 골목이 바로 '피맛골'(사진). 교보문고까지 쭉 이어져 있는 오래된 골목이다. 피맛골로 들어서자마자 '피맛골 주점골목'을 알리는 간판이 나오고 간판따라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길의 양쪽을 채운 주점들이 확 눈에 들어온다.

골목을 따라 허위허위 걷다보면 '장날주막'이 나오고 그 앞에 간판도 없고 무슨 허물어져가는 흉가 비스무리한 가게가 하나 있으니 여기가 그 유명한 '고갈비'집이다. 막상 고갈비집에 가려니 아무래도 찜찜하긴 하다. 이렇게 생긴 집에서 만들어내는 음식이 과연 제대로 된 걸까... 하는 마음에. 그래도 그 명성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들어가고 안 그러면 장날주막에 가면 된다.

두번째 제안인 종로1가 낙지집은 타워레코드에서 길을 두번 건너 금강제화에서 교보문고쪽으로 랄랄라 가다보면 나오는 '공안과' 사거리에 있다. 공안과 사거리를 잘 모르면, 교보문고쪽으로 걷다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종로구청이 어디 있어요?" 물어보자.

공안과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종로구청 가는 길이 나오는데 낙지집은 종로구청 가는 길 초입에 있다. 가게 이름은 그 유명한 '실비집'.

나오는 것은 밥·낙지볶음·조개탕·단무지·콩나물·물. 그리고 커다란 대접. 대접에 밥을 공기모양으로 엎어놓고 낙지를 조금 올리고 콩나물을 섞어 비벼가며 먹는다. 매우면 시원한 단무지와 물, 조개탕 국물로 달랜다. 정말 맵지만, 다른 집들과는 달리 뒤끝이 남지 않는 깔끔한 매운 맛이다. 이 근방에 이런 저런 낙지집이 있지만 실비집만한 데는 없는 것 같다. (이건 순전히 본 기자의 생각이다) 먹고싶다 실비집 낙지볶음.

이것으로 오늘 데이트도 끝이다. 에이 종로라 그래놓고는 밥은 다 다른 데서 먹네... 하는 독자들의 원성이 들리지만 무시한다. 우헤헤. 실비집도 알고보면 종로(1가)에 있는 거고 LG화재쪽도 뭐, 종로랑 대각선 하나 차이밖에 안 나니까 용서해주세요.

〈Note〉

날씨가 추워진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그치고나면 엄청나게 추워진다는군요. 주말데이트족들은 이제 어떡하시나요 흑흑흑 T_T. (여기서의 눈물은 독자에 대한 걱정을 빙자한 것으로서 추운 날씨에 취재다닐 것을 벌써 걱정하는 본 기자 개인감정의 발로.)

그래도 저는 열심히 걸어다니며 여러분에게 재미있는 데이트 꺼리 물어다 드리겠습니다. 항상 행복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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