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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메', 순도 1백%의 화재영화

중앙일보

입력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구경은 불구경이라고 했다. 당하는 사람에겐 비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선 그야말로 스릴 만점이다.

11일 개봉하는 영화 '리베라 메' (감독 양윤호)는 불구경 하나는 확실하게 해준다.불에서 시작해서 불로 끝나는 순도 1백%의 화재영화다. 스산한 늦가을, 몸이 으실으실하게 한기를 느낀다면 '리베라 메' 가 제격이다. 시종일관 전신이 후끈할 정도로 엄청난 화염이 몰려든다.

사실 '리베라 메' 는 기대 반, 우려 반이 섞였던 영화였다. 45억원이란 막대한 금액을 투자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재난영화란 점에서 관심을 끈 반면, 지난달 말 먼저 개봉한 '싸이렌' (감독 이주엽) 역시 똑같이 화마 (火魔) 를 다뤄 양자 사이의 변별성이 의심스러웠다. 일부에선 두 작품의 엇비슷한 외형을 놓고 한국영화의 기획력 부족을 꼬집기도 했다.

그러나 '리베라 메' 는 이런 비판을 일순에 태워버릴 듯한 기세다. 작품의 시대성과 의미, 예술적 성취 등을 접어두고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는 상업영화의 기준에서 보면 분명 한국영화론 뛰어난 결과물을 내놓았다.

'리베라 메' 는 라틴어로 '우리를 구원하소서' 란 뜻. 19세기 후반 프랑스 음악가 가브리엘 포레가 작곡한 레퀴엠 제목으로 영화에선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됐다.또 연쇄방화범 여희수 (차승원) 의 범행동기다. 비록 그것이 불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릇된 생각이지만….

영화는 첫장부터 불로 관객을 압도한다. 부산의 아파트 단지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는 것. 초반 20여분 동안 정신을 쏙 빼놓는다. 아파트를 뒤덮은 각양각색의 불꽃, 수시로 밀려드는 화염이 내뿜는 굉음, 소방대원의 긴박한 인명구조 등. 과장하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첫부분에서 연출했던 프랑스 해안상륙 전투신을 연상시킨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4억원을 들여 실제 크기로 재현한 주유소 세트 폭발장면, 마지막 병원 화재장면 등 제작진은 조금도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중간중간 컴퓨터 그래픽이 미숙하고, 정말 영화 같은 화재구나 하는 느낌도 어쩔 수 없이 들지만 작품 전체를 해칠 정도로 심각한 결함은 아니다.

구성도 단단한 편이다. 현란한 볼거리를 전진 배치하되 이를 설득력 있게 꾸려가는 시나리오가 튼실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에 대한 앙갚음에서 불로 세상을 '정화' 하려는 희수와 이에 맞서는 소방대원의 대결 구도가 팽팽하다.

진화현장에서 동료를 잃어 구조작업에 결사적으로 매달리면서도 후배들에겐 자상함을 잃지 않는 조상우 (최민수) , 그런 상우에 불안을 느끼다가 도중에 희수에게 희생되는 김현태 (유지태) , 화재현장 조사관으로 나오는 유일한 여소방대원 현민성 (김규리) 등이 서로 튀지 않고 부드럽게 맞물린다. 액션에 힘을 싣되 용두사미격 멜로.세태물로 빠지지 않은 집중력이 살아있다.

속으론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면서도 겉으론 차분하고 다감한 표정을 잃지 않는 희수의 이중성을 무리없이 소화한 차승원은 모델 출신 탤런트 차승원이 아닌 영화배우 차승원을 예고케 한다.

비장함이 가득한 영화에 모난 돌처럼 튀어나온 캐릭터는 박상면이 연기한 소방대원 박한무. 박상면의 연기가 서투르다는 게 아니다. 제작진은 휴일 비번마저 포기하고 화재현장에서 산화하는 소방대원의 가슴 뭉클한 최후를 그리려고 했지만 너무 그런 모습을 강조한 탓인지 돌연 신파조가 끼어든 분위기다.

끝까지 석연찮은 구석은 희수의 방화동기. 작품을 끌고나가는 중심축이 할리우드 스릴러와 너무 닮았다. 유년 시절의 아동학대와 그에 따른 세상에 대한 증오. 현재 상영되고 있는 '더 셀' 등 수없이 보았던 소재다.

'리틀 할리우드' 의 장대한 화면을 만든 노고를 십분 인정하면서도 뒷맛이 썩 개운하지 않다. 우리 사회도 진정 미국의 병리를 복사하는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래야 우리 영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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