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 FTA 입장 바뀌었다니 … 그건 그분을 비하하고 폄하하는 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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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2008년 11월 10일 ‘한·미 FTA 비준, 과연 서둘러야 할 일일까요’라는 칼럼을 남긴다. 여기엔 “한·미 FTA 체결 후 미국 금융위기로 상황이 변했으니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는 취지의 언급이 나온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진영 일각에선 이 칼럼을 인용해 한·미 FTA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입장이 달라지거나 근본적인 생각이 바뀐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김병준(국민대 교수) 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장은 16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자꾸 (반FTA 진영에서) 노 전 대통령을 팔아서 ‘FTA한 걸 후회했다’고 그런다면, 당시 정책팀들은 참 당혹스럽다”며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마음을 크게 바꾼 것처럼 말하면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자문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2003년 4월~2006년 5월), 청와대 정책실장(2004년 6월~2006년 5월), 교육부총리(2006년 7~8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2006년 10월~2008년 2월)을 지내면서 거의 5년 임기 내내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총괄했다.

●그럼 노 전 대통령의 FTA에 대한 입장은 퇴임 후까지 유지됐던 겁니까.

 “그렇죠. 그 사람들이 ‘미국 금융위기가 와서 노 대통령이 FTA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는 식으로 얘기한다면 FTA를 추진할 때 미국 금융위기를 전혀 몰랐다는 얘기인데, 미국과 협상할 때는 이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단 말이에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의미조차 당시 정책팀이나 경제부처가 몰랐고, 노 대통령이 그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면, 그건 노 대통령을 비하하고 폄하하는 얘기예요.”

 그러면서 그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이 글을 썼던 상황과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8년 11월 10일은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였다. 미국 자동차 노조의 적극 지지를 받고 있던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FTA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내놓고 있었고, 사실상 한국은 미국 측으로부터 재협상을 요구받은 상황이었다. 이때 이명박 정부는 조속히 국회 비준을 마쳐 노무현 정부에서 체결된 협상을 못 박으려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칼럼을 썼다.

 “···우리가 (국회에서 FTA) 비준을 한다 하여 미국 의회가 부담을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재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미국 의회는 비준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미 FTA는 폐기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먼저 비준을 하고 재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한·미 FTA를 폐기하자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한·미 간 협정을 체결한 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했습니다. 한·미 FTA 안에도 해당되는 내용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재협상 없이는 발효되기 어려운 협정입니다. (FTA를) 폐기해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비준을 서두를 것이 아니라 재협상을 철저히 준비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결국 오바마 정부가 요구하는 재협상에 한국이 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한·미 FTA를 폐기해 버릴까 걱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이를 부분적으로 발췌해 왜곡시키고 있다는 게 김 이사장의 지적이다.

●반FTA 진영에선 한·미 FTA 협상팀을 ‘매국노’ 또는 ‘사실상 미국인’이라고도 비난합니다.

 “말조심해야 해요. 논리로 얘기를 해야지 ‘미국 스파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FTA에 반대하던) 어떤 청와대 비서관 출신들은 협상팀을 잘 아는 것처럼 동네방네 인신공격을 하고 다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실제론 FTA 협상과정에서 배제됐었어요. 노 전 대통령이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밥도 같이 먹으면서 ‘왜 반대하는지 당신들 입장을 설명해보라’고 한 적도 있어요. 대통령하고 토론을 했는데, 이분들은 대통령 설득을 못했어요.”

●한·미 FTA가 결국 발효됐습니다.

 “굉장히 깊은 주의를 가지고 대처해야 해요. 우리가 칠레하고 FTA를 하고 난 다음에 봤더니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더라고. 다들 시장에서 포도농가가 엄청 타격을 입을 거라고 보고 부산을 떨었잖아요, 그런데 정작 포도농가는 타격을 안 입고, 삼겹살하고 홍어가 확 들어와서 축산농가 등이 타격을 입었어요. 우리가 생각지 않은 게 교역 부문에 나타나는 거죠. 교역은 그나마 예측이 가능하지만 서비스 부문은 뭐가 일어날지 몰라요.”

●민주통합당 요구처럼 ‘재재협상’을 해야 합니까.

 “폐지나 재재협상은 사실상 불가능한 거죠. 양쪽이 서로 주권국가 아닙니까. FTA 발효 후 만일 우리가 손해 보는 부분이 있다면 비준 내용을 바꿔달라고 하는 건 곤란하고, 다른 부분에선 요구할 수 있을 겁니다. 뭘 받아야 할지, 어떤 손해가 있을지 그걸 지금 챙겨놔야 합니다. 미국도 자기네가 마이너스다 싶으면, 우리에게 요구를 할 거고. 그런 점에서 할 일이 많아요. 한·미 FTA는 재앙도 아니고 축복도 아닙니다.”

 이어 김 이사장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FTA가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야지! 안 하면 어떡할 거야? 어떻게 하든지 만들어 가야 돼요, 이거···.”

 그의 음성이 절박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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