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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재벌 비리 사건’의 공식과 태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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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기환
사회2부 기자

‘태광’은 공식을 따랐다. 회사 돈 수백억원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기소돼 21일 징역 4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이호진(50) 전 태광그룹 회장의 1심 재판 얘기다. 2010년 10월 검찰 수사로 시작돼 지난해 6월부터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태광은 그동안 수차례 지켜본 적 있는 ‘재벌 비리 사건’ 공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첫째, 혐의가 닮았다. 이 전 회장은 계열사에서 만든 제품을 무자료 거래를 통해 빼내거나 임직원에게 급여를 준 것처럼 회계 처리해 208억원을 횡령했다. 계열사 주식을 헐값에 사들였고 직원 피복비를 빼 비자금을 조성했다. 세금 11억원을 포탈한 혐의도 인정됐다. 이쯤 되면 “횡령·배임이 조직적으로 이뤄졌고 수법이 불량하다”는 재판부 설명대로 비리의 ‘종합 세트’다.

 둘째, 대응 방식이 닮았다. 서울서부지검의 수사가 시작되자 태광은 당시 지검장과 검찰 재직 시절 인연이 있는 검사 출신 변호사부터 선임했다. 지난해 4월엔 이 전 회장의 간암 수술을 이유로 보석 허가를 신청했다. 보석은 기각됐지만 구속 집행은 11차례 정지됐다. 지난해 7월 선고 예정이었던 재판은 25차례 계속됐다.

 셋째, 재판을 앞둔 마지막 모습이 닮았다. 이 전 회장과 태광 경영진은 선고를 10여 일 앞두고 사퇴했다.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게 이유였다. 그간 재벌 총수들이 법원 선고를 앞두고 사퇴해 형량을 낮춘 뒤 일정 기간 후 복귀한 모습과 겹친다. 재판정에는 휠체어를 타고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투병 중인 환자란 점을 고려해 선처해 달라”고 호소했다.

 공식대로라면 닮을 게 하나 더 남았다. ‘솜방망이 처벌’이다. 지난 10년 동안 비슷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재벌 총수들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란 판박이 선고를 받았다. 태광이 공식에서 벗어난 점이 있다면 딱 하나.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공식의 파괴’ ‘개혁의 시작’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태광은 재벌이지만 재계 40위권 규모다. ‘이례적 판결’이란 평가도 썩 어울리지 않는다. 수백억원을 횡령한 죄로 실형을 선고받는 것은 당연한 판결이다. 태광 사건이 그동안의 공식을 벗어난 사례로 남을지는 2심을 지켜본 다음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