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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억원 다툰 무상급식 투표 불과 반년 전인데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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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정치권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지난해 8월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695억원 다툼이 발단이었다. 초등학교 무상급식 예산의 32.4%에 해당하는 이 돈을 오세훈 당시 시장이 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노라면 695억원은 정말 껌값이 아니었나 싶다.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민주통합당이 경쟁적으로 ‘베팅’하는 돈은 몇백억원이 아니다. 둘 다 몇조, 몇십조를 우습게 안다.

 민주통합당이 7조6000억원을 들여 무상의료를 하겠다고 공약하자 새누리당은 1조원 이상이 드는 초·중·고교 아침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받는다. 기초노령연금을 올리겠다니까 다른 쪽은 고교 의무교육을 하겠단다. 2조원 이상 드는 대학생 반값 등록금에는 둘 다 달라붙었다. 군 사병 월급을 40만원으로 올리자는 쪽과 적립금 월 30만원을 주자는 쪽이 요란하게 호객 경쟁을 하고 있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이라는 노랫말은 이미 우문(愚問)이 돼버렸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 했던가. 양당은 이미 너무 많이 가버렸고, 유권자 입장에선 현실적으로 두 당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런데 불안하다. 이렇게 마구 달려도 되는 걸까. 겨우 695억원을 갖고 나라가 두 쪽으로 갈려 핏대를 올리던 게 불과 6개월 전인데 왠지 아득한 옛날같이만 느껴진다.

 더운 여름날 미국 텍사스주. 한 가족이 집에서 한가롭게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장인어른이 “애빌린에 저녁식사나 하러 갈까?”라고 제안했다. 애빌린은 집에서 85㎞가량 떨어진 마을. 아내가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요”라고 받았다. 남편은 무더위에 차를 몰고 갈 일이 걱정됐지만 장인·아내의 눈치가 보여 “괜찮은데요. 장모님도 가고 싶어 하시면 좋겠네요”라고 말했다. 장모는 “물론이지. 애빌린에 가본 지 꽤 오래됐거든”이라고 맞장구 쳤다. 더위와 먼지에 시달리며 애빌린에 도착했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았고, 식당 음식도 형편없었다. 4시간 뒤 집에 돌아와서는 말들이 달라졌다. 장모는 남들이 권해 할 수 없이 따라나섰다고 했다. 남편은 “모두 원하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아내는 “당신을 위해 간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말을 꺼냈던 장인은 “다들 지루해하는 것 같아서 그냥 제안해 본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각자 원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의견과 상반된 결정에 동의한 셈이다. 경영학에서 유명한 ‘애빌린의 역설(Abilene’s paradox)’이다.

 복지의 필요성이야 누가 모르겠느냐마는 다투어 돈 빼 쓸 궁리만 하지 벌 방법은 외면하니 답답한 거다. 텍사스 일가족은 어쨌든 4시간 뒤 집에 돌아왔지만 지금 우리는 한 번 떠나면 다시 못 올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불안한 거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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