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43) DJ에게 일부러 야단맞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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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999년 6월 18일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금감위에서 1차 기업 퇴출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55개 기업이 퇴출됐다. DJ의 두 차례 질책 끝에 나온 명단이었다. [중앙포토]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소문나게 질책을 받은 일이 몇 번 있다. 그중 한 번이 1998년 6월 3일 퇴출 기업 명단을 들고 청와대로 들어간 날이다.

 퇴출 명단. 당시엔 기업 살생부로 불렸다. DJ가 5월 11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언급해 시장을 뒤흔든 그 살생부다. DJ는 당시 “죽일 기업은 죽이고 살릴 기업은 살리겠다” “이달 말까지 부실 기업을 선정해 퇴출시키겠다”고 했다. 이미 4월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었다.

 시장이 요동쳤다. 온갖 퇴출기업 명단이 금융권을 돌아다녔다. 나는 진화에 나섰다.

 “살생부(殺生簿)가 아니라 소생부(蘇生簿)다. 살 기업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은행이 자율적으로 부실 기업을 정한다. 극히 문제가 되는 대기업만 퇴출될 것이다.”

 큰 틀에서 사실이었다. 이미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시절부터 ‘은행을 통한 기업 구조조정’을 약속한 터다. 금융감독위원회는 각 은행에 “각자의 판단에 따라 퇴출 기업을 골라내라”고 주문했다. 국내 은행들은 그때까지 기업의 금고나 다름 없었다. 기업 신용을 평가하는 역할은 거의 하지 못했다. 이참에 그걸 배우라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부실 기업 판정. 은행들은 버거워했다. 우선 부실 기업 퇴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퇴출된 기업에 빌려준 돈은 모두 부실 채권이 된다. 고스란히 은행 부담이 되는 것이다.

특히 대기업 계열사는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계열사라도 뒤에는 대마불사의 본사가 버티고 있다. 괜히 건드렸다가 거래가 끊길까, 본사가 부실해질까 겁을 냈다.

 은행들이 마지못해 제출한 기업 명단은 21개. 민망할 정도였다. 그것도 이름 없는 작은 회사들뿐이다. 5대 그룹 계열사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금감위가 명단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은행이 자율적으로 정한다”고 이미 원칙을 밝힌 터다. 각 은행에서 제출한 명단을 “단순 집계만 하라”고 한 뒤 그대로 청와대에 들고 간 건 그래서였다. 직원들이 “도저히 이대로는 제출하지 못한다”며 말리는 것을 뿌리쳤다. 보고서는 달랑 한 장이었다.

 DJ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명단을 살폈다. 그리고 나를 노려봤다.

 “이 정도로 국제사회 평가를 받을 수 있겠소?”

 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흡합니다.”

 미흡한 정도가 아니다. 이대로 나갔다간 웃음거리가 된다. DJ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해서 무슨 구조조정을 한단 말이오. 이걸 명단이라고 들고 왔어요? 금감위원장이 좀 책임을 지고 일을 해야 하지 않소.”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이 DJ를 거들었다.

 “대통령께서 직접 경쟁력 없는 기업을 퇴출시킨다고 했는데, 고작 21개라면 누가 납득하겠습니까. 더구나 5대 재벌 계열사는 하나도 없으니.”

 나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정신차리세요.”

 돌아서는 내게 DJ는 차갑게 말했다. 금세 소문이 퍼졌다. ‘은행들이 제출한 명단이 너무 부실했다. DJ가 엄청 열받았고, 이헌재가 세게 깨졌다’는 소문이다. 8일로 예정됐던 퇴출 기업 발표는 연기됐다. 소문은 효과가 있었다. 은행들은 바짝 긴장했다. “명단을 다시 제출하라”는 금감위의 요구에 즉각 움직였다. 기업들도 바짝 긴장했다. 몇몇 재벌은 알아서 부실 계열사를 추려내 “이 정도면 되겠느냐”고 금감위 실무진에 들이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은행은 한 번도 제대로 갑 노릇을 해본 적이 없었다. 칼자루를 쥐여 줘도 휘두를 줄 몰랐다. 청와대가 원하는 ‘납득할 만한 명단’이 좀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번 더 세게 야단을 맞았다. 16일 국무회의에서다. DJ는 “금감위가 노력은 했으나 은행 장악력이 부족하다”고 나를 대놓고 질책했다.

 두 차례의 질책 끝에 은행과 금감위는 퇴출 기업 명단을 확정해 17일 청와대에 제출했다. 모두 55곳. “5대 그룹 계열사가 20개 포함됐다”는 보고에 DJ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에 차진 않지만 이 정도면 됐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숫자가 중요하진 않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시장에 던지는 메시지가 중요했다.

 18일 퇴출 명단을 공식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정리했다. “경쟁력에 문제가 있는 기업이 구조조정을 못하면 더 이상 금융회사가 돈을 빌려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은행이 알아서 부실 기업을 퇴출시키게 될 겁니다.” 만난 사람=이정재 경제부장

등장인물

▶이규성(73)

재무부 출신 관료. 노태우 정부에서 국무총리실장과 재무부 장관을 지냈고 DJ 정부에서도 첫 재정경제부 장관을 맡았다. 나는 초임 사무관 시절 재무부 기획관리실에서 그를 과장으로 모시고 일했다. DJ 정부 초기 기업 ·은행 구조조정 과정에서 그는 나의 든든한 정책적 후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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