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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업무는 휴대폰으로…인사발령도

중앙일보

입력

이어폰을 낀 채 길을 걸으면서, 혹은 달리는 지하철 속에서 휴대전화기의 숫자판을 열심히 눌러대는 모습은 전형적인 n세대의 모습이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문자메시지 서비스는 이미 젊은 세대의 필수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일본에서는 이처럼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려가며 휴대전화기로 무선 전파가 이어주는 누군가와 문자 대화를 나누거나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사람을 일러 ‘엄지족(親指族:오야유비조쿠)’이라 부른다. 최근엔 중년 신사나 비즈니스맨 가운데서도 이 같은 엄지족의 모습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한국과 다른 점이다.

파나소닉이란 브랜드로 알려진 굴지의 가전 메이커 마쓰시타덴키(松下電器)의 나카무라 구니오(中村邦夫)사장도 엄지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내리는 업무지시의 상당수는 일본의 이동통신업체 NTT도코모의 ‘i모드 서비스’를 통한 것이다. 두꺼운 서류더미는 물론 휴대용 노트북 컴퓨터조차도 나카무라 사장에겐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i모드가 위력을 발휘하는 건 나카무라 사장이 승용차를 타고 있을 때다. 달리는 차안에서 임원들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고 보고를 받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리시타 요이치(森下洋一)회장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다. 그러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업무에 임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i모드는 종전의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와는 조금 다르다. 1대 1의 커뮤니케이션만 가능한 메시지 전송기능과는 달리 인터넷을 통해 한꺼번에 복수의 가입자에게 같은 메시지를 보낼 수 있도록 완벽한 e메일 시스템을 구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카무라 사장은 지난 7월 초 취임하자마자 4백50여명의 간부들에게 전원 i모드에 가입하라고 지시했다. 자사에서 i모드용 휴대전화기를 생산하고 있으니 당연한 지시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한 달 후, 간부들의 휴대전화엔 “여름 휴가중에 사용법을 익혀 둘 것 나카무라”라는 짧은 메일이 일제히 배달됐다. 그 이후, 마쓰씨타의 간부들은 너나없이 ‘엄지족’이 됐다. 그는 사장취임 이전 분사장 시절엔 휘하의 부사장 인사발령을 i모드로 내려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IT시대의 기업간 경쟁은 어떻게든 각자의 창조적인 시간을 만들어 내느냐는 ‘시간경쟁’이며 30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마쓰시타와 같은 거대기업은 의사소통의 스피드야말로 경영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게 그의 지론. 이 같은 경영철학에 i모드는 딱 떨어지는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모습은 마쓰시타덴키의 간부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랜 역사를 지닌 택배업체 사가와규빈(佐川急便)의 배달트럭 운전수들은 지난 7월부터 i모드 단말기를 통해 배달지시를 내리고 있다. e메일이 도착하면 휴대전화의 화면에는 배달 의뢰자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배송물의 내용 등이 표시된다.

종전에는 이 같은 배달지시가 트럭에 설치된 무선 단말기를 통해 인쇄돼 나왔다.하지만 하루 1백여건의 배달물량을 처리하는 운전수들이 트럭을 비우고 짐을 나르는 동안에는 이 같은 지시를 받을 수 가 없었다.

i모드를 도입한 뒤엔 e메일 수신후 즉각 ‘배달물 접수가능’여부를 응답할 수 있어 본사에선 쉽게 배달가능 차량을 수배할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택배를 의뢰한 고객으로부터 “왜 이렇게 늦느냐”며 배달의뢰를 취소당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사가와규빈은 밝히고 있다.

이처럼 휴대전화 단말기를 통한 e메일·인터넷 서비스가 일본의 비즈니스 현장의 풍속도를 바꿔놓고 있다. 8월로 가입자 1천만명을 돌파한 NTT도코모의 i모드를 비롯, 일본이동통신(IDO)과 DDI의 셀룰라, J폰의 J스카이, 쓰카의 이지웹 등 각 이동통신업체들이 같은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업계에선 이 같은 현상을 ‘일본형 IT혁명’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를 통한 IT화에는 미국에 크게 뒤떨어졌지만 휴대용 단말기를 통한 IT화를 통해 미국을 따라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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