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사외이사 툭하면 '동네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금융기관을 감독하는 금융감독위원회의 비상임위원과 대기업의 사외이사는 겸직할 수 없는 것인가.이 문제를 논란을 빚은 세명의 금감위 비상임위원이 26일 사외이사직을 물러났다.

박상용·박진원·국찬표 위원이 사외이사를 사임하자 박상용·박진원 위원을 사외이사로 추천했던 참여연대는 물론 해당 기업이 황당해하고 있다.

박진원 변호사는 현대중공업 사외이사로 현대전자가 외자를 유치하면서 빚보증을 서준 데 대해 문제를 제기,소송에 이르게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참여연대는 국내 기업의 사외이사 모범 사례로 외국인 투자자에게 설명할 참이었다.

박상용 교수도 참여연대가 소액주주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설득해 데이콤의 사외이사를 맡았었다.

◇금감위원 자리를 떠날 생각도 했다=해당 위원들은 모두 고심 끝에 사외이사직을 포기했다고 밝혔다.이해관계가 상충하지 않는 자리의 겸직 문제를 공개 토론의 장으로 끌어내 합리적인 룰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박상용 교수는 “잘못된 일을 하다 틀켜서 그만두는 것 같아 씁쓸했다”면서 “금감위원직을 사직할 생각도 했지만 정부기관을 흠집내는 것 같아 사외이사직을 그만 두었다”고 말했다.

朴교수는 “독립성과 윤리성을 갖추고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사안에서는 심의에서 배제하면 겸직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진원 변호사는 ‘재벌’‘거액의 보수’‘막강한 금감위’등의 낱말 때문에 중도에 사외이사직을 포기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전자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 그동안 한 일이 많은데 앞으로 어떻게 될 지 걱정”이라면서 “재벌을 옹호했다는 증거도 없이 ‘그만 두라’는 말에 좌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증권관리위 상임위원이 된 뒤 바로 일은증권 사외이사를 그만 두었으며,지난 7월 자신이 빠진 증관위 심의에서 현대중공업은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4개월 유상증자 금지 조치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국찬표 교수는 지난해 4월 삼성엔지니어링으로부터 사외이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금감위에 법적 하자가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금감위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대기업 오너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사외이사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면서 “이제 와서 사외이사를 맡은 게 마치 재벌로부터 돈을 받고 편을 들어준 것처럼 매도하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황당해 하는 해당 기업과 참여연대=세명 중 두명을 추천한 참여연대측은 황당해하고 있다.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인 장하성 교수는 “송자 전교육부장관 때문에 사외이사제도가 문제가 되면서 언론에서 마구잡이로 비난하고 있다”면서 “사외이사를 할만한 사람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훌륭한’인물들을 끌어내리면 누가 소액주주를 대변하느냐”고 반문했다.

張교수는 “박진원 변호사는 정부나 주주 등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현대중공업에서 해냈다”면서 “명백한 잘못도 없이 이들이 떠나게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朴변호사와 함께 진행 중인 사안이 많은데 누가 대신할 지 모르겠다”면서 “겸직 문제에 대해 감정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법이나 규칙 등 명확한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박병기 부사장 등 경영진은 朴변호사의 사임을 적극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데이콤 관계자도 “29일 데이콤의 장기 발전전략을 놓고 이사회에서 장시간 토론을 벌이기로 예정돼 있다”면서 “이사회 때마다 많은 것을 준비했고 회사 발전을 위해 노력한 朴교수가 사직해 아쉽다”고 말했다.

◇엇갈리는 다른 사외이사 반응=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현대 계열사의 모 사외이사는 “인력 풀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사외이사를 못하게 하면 누가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겠느냐”고 반문했다.

LG 사외이사인 모 변호사는 “이해 상충이 생기면 심의·의결에서 배제하면 되는데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 인물을 그만 두도록 해야 하느냐”면서 “오너와 의견을 달리 하며 회사발전을 위해 충고할 수 있는 사외이사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그만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LG건설 사외이사인 전용수 교수는 “오해의 불씨를 막기 위해 사표를 낸 것은 매우 용기있는 일”이라고 말했다.현대전자 사외이사인 우창록 변호사는 “정부기관의 위원들은 사적인 업무를 자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면서 “겸직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의혹을 받을 소지는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사외이사제 정착을 위해선=연원형 금감위 상임위원은 “기업 오너의 영향력에 맞서 할 말은 할 수 있는 지위나 학식을 갖춘 사람이 사외이사를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되지 않는데 이런 저런 명분으로 제약한다면 사외이사제가 정착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환경단체나 시민단체와 같이 기업 오너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많이 참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선진국의 경우에도 정부산하 위원회에 소속된 비상임위원들이 민간기업의 사외이사를 맡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그래서 나온 것이 ‘제척제도’로 자신이 소속한 기관이나 이해관계가 걸린 기업에 대한 처리문제가 위원회에 올라올 때는 의결에서 빠지는 제도다.

미국의 경우 몇해전 금융기관 부실을 정리하는 RTC라는 기구를 만들면서 금융기관 사외이사는 비상임위원을 맡지 못하도록 했지만 기업 사외이사에 대한 제한은 없었다.

현재 사외이사의 자격요건은 증권거래법에 명시돼 있으나 선임 절차는 마련돼 있지 않다.사외이사를 기업 오너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뽑지 못하도록 견제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또 사외이사 윤리규정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