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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가격 1조원’ 또 하나의 훈민정음 해례는 어디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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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배 씨가 2008년 공개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왼쪽)과 국보 제70호인 간송본의 복사본. 문화재청은 상주본을 “가격을 산정할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며 “굳이 따진다면 1조원 이상으로 판단된다”는 의견을 냈다. 배씨가 자료를 공개한 뒤 소유권 분쟁에 휘말리면서 상주본은 현재 종적을 감춘 상태다.

국보급 문화재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숨긴 혐의로 기소된 배익기(49·구속)씨의 9일 선고 공판을 앞두고 종적을 감춘 ‘상주본’에 다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008년 7월 경북 상주시의 배씨는 문화재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집에서 고서적 한 권이 나왔는데 국보 문화재로 지정 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TV를 통해 “국보 70호인 훈민정음과 동일한 판본이 상주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한국국학진흥원 임노직(50) 연구원이 감정을 맡았다. 국보로 지정된 간송본보다 종이 상태가 양호하고 ‘오성제자고(五聲制字攷)’란 책 제목이 붙어 있었다. 또 임진왜란 이전 책을 본 사람이 적은 음운학적인 주석도 보였다. 문화재계는 깜짝 놀랐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동안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방송에 공개된 지 10일 만에 또다른 ‘주인’이 나타났다.

 상주의 골동품상 조모(67)씨가 “배씨가 고서적 두 상자를 30만원에 사가면서 해례본을 함께 넣어 몰래 가져갔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배씨는 “우리 집에서 나왔다”고 반박했다. 두 사람은 절도와 무고 등으로 맞고소를 했고 물품 인도를 청구하는 민사소송이 이어졌다. 형사 사건은 소유권이 결정되지 않아 무혐의 처리됐다. 민사소송은 배씨가 변호인 없이 3년여 이어진 뒤 지난해 6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배씨가 훔친 것이니 조씨에게 돌려 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배씨는 꿈쩍도 않았다. 그 사이 해례본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검찰과 법원이 세 차례 배씨 집 등을 강제집행하고 압수수색했지만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검찰은 지난해 9월 배씨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해례본이 어디 있는 지에 대해 계속 함구하고 있다. 검찰은 지난달 26일 결심 공판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소재를 밝히지 않고 범행을 부인하는 등 죄질이 나쁘다”며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문화재청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굳이 따진다면 1조원 이상으로 판단된다”는 의견을 냈다.

 상주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또 어떤 상태일까. 이 책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현재로선 수감된 배씨뿐이다. 기자는 3일 상주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를 만났다.

 - 훔친 게 아닌가.

 “ 훔쳤다면 문화재청에 뭐하러 지정 신청을 했겠나. 공개하기 1년 전부터 심상치 않음을 알고 들여다 본 책이다. 그냥 두면 위험하겠다 싶어 문화재로 지정받으려 했는데 ….”

 - 왜 소중한 문화재를 낱장으로 뜯었나.

 “해례본은 실로 꿰매졌다. 실은 종이보다 약하다. 실이 삭아 그런 상태가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 밀반출을 걱정한다.

 “나는 적어도 그런 일은 없다.”

 - 해례본은 어디에 두었는가.

 “여기 오고부터 모른다. 능력 밖의 일이다.”

 - 훼손될 위험은 없나.

 “거기에 대한 책임은 못진다. 뺏고 보자는 것인데 … 불상사 난다면 난 책임 못진다.”

 - 어떻게 하면 좋겠나.

 “무죄로 풀어 놓고 시작해라.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 있다. 굴복해서 내놓을 수는 없다.”

 경찰은 현재 배씨의 집 주변을 유력한 상주본 소재지로 추정하고 있다. 상주본이 나온 배씨 집을 찾았다. 집 마당과 마루·처마 등에 골동품과 고서적이 나뒹굴어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같은 집이었다. 혼자 집을 지키는 배씨의 형은 “그동안 동생이 살던 집이어서 그 책은 본 적도 아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대구지법 상주지원은 9일 오전 10시 배씨 사건에 대해 선고한다. 이날 판결은 상주본의 운명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게 됐다.

◆훈민정음 해례본=조선 세종 28년(1446년) 발간된 한글(훈민정음)의 해설서다. 전체 33장의 목판본이며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의미·사용법 등을 담고 있다. 목판으로 인쇄됐기 때문에 어딘가에 또다른 판본이 있을 것으로 관측돼 왔다. 첫 발견된 해례본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돼 국보 70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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