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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예산만 늘린다고 중복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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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용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

한국인은 근면하다는 국제적 평판은 여전히 유효한가. 2010년 한국 근로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2193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 회원국 중 1위다. 이 통계는 한국인이 여전히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2000년의 2512시간과 비교하면 319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근로의욕 감퇴 현상이 우려할 수준이다. 지난해 실업자수가 86만 명에 이르지만 중소기업은 일할 사람이 없어서 발을 구르고 있다. 지난해 고용허가제에 의한 외국인 근로자수는 49만 명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외국인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좋은 일자리만 찾는 구직자와 3D 일자리 사이의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양극화 문제도, 저성장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기술발전으로 성장의 고용 유발 효과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대기업과 수출기업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가 중소기업과 내수부문에 환류되면서 이 과정에서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소득과 소비의 흐름이 선순환돼야 한다. 그런데 중소기업과 내수부문에서 만들어진 일자리가 저임금과 고용불안으로 외국인 근로자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긴 근로시간뿐 아니라 좋은 일자리가 아니면 기피하는 현상도 큰 문제다. 이에 대한 국가적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드는 것도 필요하지만 덜 좋은 일자리라도 우리 국민이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이 떨어진 근로의욕을 다시 높이는 것이다.

 최근 복지지출이 국내총생산(GDP)의 10% 수준으로 높아지면서 우리나라도 근로의욕 저하를 걱정하게 됐다. 국가는 근로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인간다운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야 하고,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은 복지병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복지제도는 곳곳에서 이러한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을 키워 가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보충급여방식으로 설계돼 있어 일해서 벌어들인 소득만큼 생계급여가 감소되기 때문에 굳이 열심히 일할 유인요소가 약하다. 현금급여 이외에도 의료급여·교육급여·주거지원 등의 급여를 받는 사람의 경우 일해서 대상자에서 제외되면 오히려 손해다. 국민연금의 재직자 노령연금이나 기초노령연금도 소득이 일정 한도 이상이면 제외되거나 급여가 감소되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만 손해라는 인식이 커질 수 있다. 산재보험도 휴업급여수준이 너무 높아 일자리 복귀를 늦추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있다. 복지는 확대돼야 하겠지만 복지제도가 근로 의욕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대상자에서 벗어나도 일정기간 의료급여를 지급한다든지, 부양자 의무기준을 완화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이뤄지고 있지만 빈곤선 이하 모든 사람을 대상자로 만들 수는 없다. 공공부조제도는 소득과 재산, 그리고 부양의무자가 모두 한계에 왔을 때 국가가 개입하는 제도이므로 최후의 사회안전망이 될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는 기초생활보장 대상자가 되기 이전에 빈곤가구로 전락되지 않도록 사회보험 중심의 소득 유지 전략이 강화돼야 한다. 하지만 사회보험료 일부를 지원하는 식의 보완책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존의 제도적 틀을 넘는 근본적인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

 기존 제도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건만 완화한다든지 급여수준만 높여 나가는 식의 복지지출의 확대는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복지의 부작용을 똑같이 양산할 수 있다. 저(底)복지 수준에서 중(中)복지 수준으로의 이행은 단순한 예산의 증가가 아닌 중복지에 걸맞은 제도의 틀로 개혁이 병행돼야 한다. 그래야 비용 효율적이고 형평적인 복지제도가 완성될 수 있다.

김용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