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나의 여행 이야기 ④ 소설가 백영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홍콩에는 신이 정말 많다. 부를 주는 신, 건강을 지켜주는 신, 행복을 주는 신, 심지어 글을 잘 쓰게 해주는 신도 있다. 향로에 꽂는 향의 길이나 굵기도 제각각이라 한 달 동안 타는 향부터 1년이나 타는 향까지 있다. 소호와 노호 사이 ‘맘모 템플’에서.

한때 홍콩은 내게 왕자웨이(왕가위, 王家衛)의 도시였다.

 그곳에 가면 가발을 뒤집어 쓴 채 밤에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린칭샤(임청하, 林靑霞) 같은 고독한 도시 여자들이 있고, 량차오웨이(양조위, 梁朝偉)처럼 ‘흰색 팬티와 메리야스’가 잘 어울리는 잘 생긴 경찰관이 있고, 물론 소독저처럼 깡마른 왕페이(왕비, 王菲) 같은 여자가 종업원으로 있는 심야 샌드위치 가게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마마스 앤드 파파스, 캘리포니아 드림,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불안한 사람들의 눈빛,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과 벽 위에 덕지덕지 매달린 무수히 많은 간판. 홍콩에 대한 내 환상의 팔 할은 왕자웨이, 그리고 그가 만든 영화 ‘중경삼림’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홍콩의 거리엔 자전거와 손수레는 물론 2층 버스와 2층 트램까지도 뒤엉켜 다닌다. 그러나 여기에도 가지런한 질서가 배어 있다.

 홍콩은 한때 내게 어둠의 도시였다. 크리스토퍼 도일(왕자웨이 영화의 촬영감독)의 흔들리는 카메라처럼 불안하게 가라앉는 도시였다. 그런 정서는 내가 가진 균열과 정확히 맞아떨어져 언제나 나를 흔들었다.

 아마도 나는 막연히 그곳으로 떠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민자가 우글대는 ‘청킹맨션’의 어두운 복도를 걷고, 한밤의 더위에 웃통을 벗어 젖힌 시끄러운 목소리의 아저씨들이 후다닥 말아주는 국수를 먹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것이 겉멋이든 치기든, 한때 내 감성의 일부를 꾸리고 있던 실체였으므로 나는 이 도시와 어느 정도 감정적인 형제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홍콩을 잘 모른다. 출장 때문에 자주 홍콩에 오는 사람일수록 ‘그랜드 바긴’ 기간에 맞춰 홍콩에 쇼핑을 하러 들르는 사람일수록 이 도시를 잘 모른다고 나는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이상할 정도로 복잡하고 미묘한 곳이 이 도시의 캐릭터라는 걸 알고 나면 현지인이 하는 이런 말들, 이를테면 “홍콩의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최소 3개월은 걸릴 거예요” 같은 소리가 그저 허장성세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서울이나 도쿄가 ‘전통’을 중시하는 음식 문화가 있다면 이 자그마한 나라의 음식 문화는 다른 지점에서 사람을 유혹한다. 가령 홍콩의 가장 트렌디한 대중음식점 ‘취와(tsui wah)’의 메뉴는 100가지를 육박한다. 메뉴만 100가지! 면면을 살펴보면 광둥(廣東) 스타일 볶음밥이나 시금치를 넣은 새우만두, 쓰촨(四川) 지방 국수에 인도 카레와 태국 똠얌꿍 국수까지 국적 불문 안 파는 게 없다. 밀크 티와 연유를 부어 만든 달콤한 디저트 빵까지 만들어 파니 말을 말자. ‘없는 거 빼면 없는 게 없고 맛없는 거 빼면 다 맛있다’는 게 홍콩 사람 말이다. 실제로 100가지 메뉴의 가격이 홍콩 달러 50달러(약 7500원) 아래라서 하루 종일 사람이 바글대고 여럿이 가면 어깨를 맞대고 밥을 먹어야 한다.

 글=백영옥(소설가), 사진=이병률(시인)

리펄스 베이 근처의 ‘베란다 카페?. 차는 물론 여러 푸짐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데 디저트 혹은 간식 이상의 양으로 조금 놀란다. 애프터눈 티를 즐기기 위해서는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뜨거운 밀크티 그립다면 떠나자

1 홍콩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산다. 스치고, 스치고를 반복하다 보면 ‘인연’이란 말이 달달하게 다가온다.

홍콩은 전통보다는 유행을 좇아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덕분에 메뉴는 몇 개월 단위로 바뀌고, 새로운 맛을 찾아 떠나는 모험가 기질의 미식가에게 더할 나위 없는 미식 환경을 제공한다. 아마도 이런 홍콩 특유의 개방적인 미식 환경이 세계 유명 셰프의 구미를 당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 조지’ ‘조엘 로부숑’ 같은 스타 셰프가 자신의 레스토랑을 홍콩에 열어 전 세계에서 사람을 끌어 모으고 있으니 말이다.

 홍콩의 유명 딤섬(點心) 체인 식당인 ‘수퍼스타 시푸드 레스토랑’의 딤섬 역시 수시로 메뉴가 바뀐다. 재미있는 건 이곳의 딤섬이 펭귄이나 토끼, 고양이나 얼룩말처럼 다양한 동물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열 명 정도 인원이 모이면 딤섬 장인인 셰프가 직접 나와 다 함께 딤섬을 만들어 보는 ‘딤섬 체험 클래스’도 운영하고 있어 직접 딤섬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울 수도 있다.

2 딤섬을 먹는 방법. 마음을 열고, 속을 열고, 지갑을 열고 … 무조건 많이 열면 된다.

 진짜 홍콩의 식도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롼 콰이퐁’과 ‘소호’, 요즘 조금씩 뜨고 있는 ‘노호’를 둘러봐야 한다. 이름이 각기 달라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걸어서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정도다. 골목 한두 개를 사이에 두고 거의 경계 없이 붙어 있다.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영화 ‘중경삼림’에서도 등장하는 미드레벨의 에스컬레이터다.

 세상에서 가장 긴 지상 에스컬레이터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사실 홍콩의 악명 높은 주차 환경과 교통 정체 때문에 생긴 것이다. 홍콩 정부가 미드레벨 지역 주민의 통근을 돕기 위해 만든 이 에스컬레이터의 길이는 800m. ‘중경삼림’에서 주인공 네 명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 이 에스컬레이터고, 주인공 왕페이가 고개를 살짝 숙여 량차오웨이의 집을 훔쳐보는 곳도 이 에스컬레이터 위다.

3 수퍼스타 시푸드 레스토랑에서 주방장과 함께 펭귄과 송아지 모양의 딤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쪄서 다 먹었다. 4 홍콩의 밤처럼 진한 색이 또 있을까. 홍콩의 밤 불빛은 너무도 아까워 늦게까지 돌아다니게 된다. 5 도시의 가쁜 호흡을 뒤로 하고 타이오 마을을 찾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시적인 풍경을 만나 숨을 고른다. 6 최첨단 고층 빌딩 사이사이에 숨겨진 재래시장을 만나는 재미 또한 남다르다. 타임스퀘어 빌딩 옆 재래시장의 들뜬 열기.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주변엔 홍콩의 1960년대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흥미로운 스타벅스도 있다. 이곳의 스타벅스는 천장에 매달린 회전식 선풍기와 옛날 포스터, 두꺼운 버터를 넣어 만든 투박한 곰보빵과 롤케이크 등 실제로 60년대에 먹었던 메뉴를 만들어 팔고 있다. 그 옛날 홀로 사는 노인들이 새가 든 나무 새장을 손에 들고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다방을 들르던 낭만이 지금도 흐르는 듯했다.

 물론 홍콩의 진짜 옛날 ‘차’ 맛을 알고 싶다면 구불거리는 옛 골목을 찾아가 ‘롼퐁유엔’ 같은 옛날 밀크 티 집에 가는 게 좋다. 저우룬파(주윤발, 周潤發) 같은 홍콩 유명인사의 사진이 가득 들어차 있는 허름한 이곳에 앉아서 실크 스타킹에 막 우려낸 밀크티와 달지 않은 홍콩식 에그 타르트와 먹는 맛도 각별하다. 미드레벨의 에스컬레이터는 60년대 홍콩과 21세기 홍콩이 공존하는 듯한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도무지 걷기 싫어하는 귀차니스트의 여행 코스로도 썩 어울려 보였다.

생선 말리는 풍경 … 작은 어촌 마을의 평화

홍콩에 핑크 돌고래가 산다는 얘길 들었다. 아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 같진 않았는데, 란타우 섬에서 페리를 타고 한 시간을 가면 돌고래 떼의 수영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날씨에 따라 돌고래 출몰 상태가 변하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그 핑크빛 돌고래를 한 마리도 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운이 좋아서 꽤 많은 돌고래를 보았다. 정말 옅은 핑크빛 등을 한 돌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내밀고 바다 위로 올라와 유영하고 있었다. 누구도 돌고래가 행운을 상징한다고 말해주지 않았지만 어쩐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존재를 보고 나면 삶에 좋은 기운이 스며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고래를 보는 또 다른 방법은 홍콩의 어촌 마을인 ‘타이오’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다. 큰 해변이란 뜻을 가진 이 작은 어촌은 홍콩 현지인에게 마음의 휴식처 같은 곳으로 노인의 마을이기도 하다.

 타이오 마을에는 어느 곳에나 생선을 걸어 말리는 집이 있고, 마을을 배회하는 고양이가 있다. 길을 걷다 보면 노인들이 함께 모여 차를 마시며 마작 돌 굴리는 소리가 와그랑 와그랑 귀에 감긴다. 마치 시간이 정지해 있는 듯한 이 풍경 속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순하게 늙은 얼굴의 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홍콩을 쇼핑 천국으로만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대단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법한 장면이었다. 타이오 마을의 이런 풍경 때문에 이곳을 들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지금 작은 어촌 마을에는 민박집이 늘고 수상 가옥을 개조해 만든 카페가 성업 중이었다.

‘작가 되기’를 빌었던 열아홉 살 … 소원은 이뤄졌네

처음 홍콩에 갔던 열아홉 살 때, 나는 아빠와 함께 리펄스 베이 끝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많은 신에게 이런 저런 소원을 빌었다. 그때 내 소원의 대부분은 ‘작가가 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 신통한 신들은 내 소원의 대부분을 이뤄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행은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의 기억은 그것을 함께 했던 사람과의 기억이고, 그곳에 함께 있던 사람과의 기억이다. 만약 홍콩에 다시 간다면 제일 먼저 란콰이퐁 거리의 작은 가게에서 입천장이 까질 것 같은 뜨거운 밀크 티부터 마시겠다. 밤에는 이곳의 밤거리를 실컷 쏘다닌 후 잘게 잘라 튀긴 마늘을 잔뜩 올려놓고 만든 화끈하게 매운 홍콩식 게 요리 ‘피퐁당’을 먹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원샷’하겠다.

 아, 하나 더 있다. 홍콩에 처음 갔던 아빠와 함께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우리가 함께 소원을 빌던 리펄스 베이 근처의 ‘베란다 카페’(영화 ‘색계’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에서 나무로 만든 창문을 열고 바닷바람 맡으며 애프터눈 티를 마시는 느긋한 낭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식민지 시대 그 아름다운 건물에 앉아, 천천히 돌아가는 회전식 선풍기를 보며 그곳에서 내가 만났던 홍콩 이야기를 해줘야지. 아마도 내가 웃으면 열아홉 살, 보름달 같던 딸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빠도 좋아할 것이다. 분명 너무 많이 살이 빠졌다고 슬퍼하시겠지만 말이다. 그 시절의 내 몸무게를 떠올리면 결국 홍콩의 맛있는 음식을 탓할 수밖엔 없겠지만.

백영옥 패션잡지 기자 출신의 소설가. TV 드라마 ‘스타일’의 원작자다. 소설 『스타일』은 1억원 고료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30만 부 이상 팔렸다. 1974년 서울 출생. 2006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장편소설 『다이어트의 여왕』, 소설집 『아주 보통의 연애』 등을 냈다.

이병률 시인. 혼자 글 쓰고 사진 찍어 엮은 여행 에세이 『끌림』의 저자다. 2005년 출간된 『끌림』은 40만 부 이상 팔린 여행 에세이 최고의 스테디셀러다.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등을 냈다.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취재 도움 주신 곳 홍콩관광청(www.DiscoverHongKong.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