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딛고 시집 낸 유정선씨

중앙일보

입력

"시력을 잃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목숨까지 어둠속에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줄기 빛이 스며들었습니다. 남을 위해 등불을 밝혀야 내 주위도 밝아진다는 깨달음이었죠."

시각장애를 딛고 시집을 내면서 시인으로 새 인생을 연 유정선(柳貞善.48.여)씨. 그는 글씨를 '그릴 순 있지만'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시상이 떠오르면 펜 대신 녹음기를 찾는다. 버튼을 잘못 만져 시가 송두리째 날아가 운 적도 많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되풀이 하면서도 4년간 시를 녹음해 왔다. 그렇게 녹음기에 쓴 시 70여편이 최근 〈어둠의 바다에서 아침을 기다리며〉라는 시집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는 "이것은 그냥 시집이 아니라 내 생명의 등대" 라고 말한다.

柳씨가 시력을 잃게 된 것은 1979년. 선천성 심장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네번에 걸친 대수술을 받고 27세의 한창 나이에 캄캄한 어둠속에서 살게 됐다.

홀어머니 심마리아(90)씨와 인천시 연수구 선학동의 열두평 임대 아파트에서 살며 숱하게 좌절하던 어느날, '삶이란 장애인들만 힘든게 아니다. 도움을 받지만 말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을 찾자' 고 결심했다.

96년 한 행사장에서 신원철(申元澈)연수구청장을 만난 것이 시작(詩作)의 계기가 됐다.

그는 집에 돌아와 申구청장을 위해 난생 처음〈따뜻한 남자〉라는 시를 썼다. 시를 쓰면서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깨달았다.

혼자서 습작을 계속하다 98년 무작정 인천대 유승우(柳承佑.61)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각장애자인데 수강료를 드릴 형편이 못됩니다. 그래도 시를 가르쳐 주실수 있으신지요. "

柳교수는 생면부지 시각장애인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는 柳교수의 강의를 녹음해 일주일 내내 반복해서 듣다 작품을 써서 柳교수에게 갖고 가 수정을 받았다.

그렇게 얻은 작품이〈운명〉〈어머니〉등 시 70편. 그의 시에는 그간의 좌절과 슬픔에서부터 장애를 극복하려는 마음들이 가득하다.

'사랑하기로 했습니다/앞을 못 보는 현실까지도' (〈현실까지도〉中)라는 구절이 이를 웅변한다.

柳교수는 "시를 지도하며 속으로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라며 "그의 작품은 그냥 작문이 아닌 눈물로 빚어낸 생명 그 자체"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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