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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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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당(黨)이란 원래 고대 가호(家戶)를 묶는 단위였다. 다섯 가호가 린(隣)이고, 다섯 린이 리(里)다. 스물다섯 리, 즉 오백 가호가 당(黨)이다. 고대에는 정치적 목적의 당(黨)을 만드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봤다. 서기 전 3세기 굴원(屈原)은 ‘이소(離騷)’에서, “당인들이 교활하게 즐기고 있으니/ 길은 어두컴컴하고 험하고 좁구나(惟黨人之偸樂兮/路幽昧以險隘)”라고 비판했다. 『서경(書經)』 ‘홍범(洪範)’장의 ‘황극(皇極)’조에 “치우침이 없고 당이 없으니 왕도는 탕탕하며, 당이 없고 치우침이 없으니 왕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는 구절이 있다. 당과 편이 없는 왕도를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왕도는 당도 없고 편도 없으니 두루 등용해야 한다는 탕평(蕩平)이란 말이 나왔다.

 사대부 계급이 집단적으로 진출한 북송(北宋) 때부터 당(黨)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북송의 구양수(歐陽修)는 ‘붕당론(朋黨論)’에서 ‘군자(君子)는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행하지만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익을 추구한다’면서 대의를 추구하는 군자들의 당을 진붕(眞朋), 사익을 추구하는 소인들의 당을 위붕(僞朋)으로 구분했다. 위붕은 군주가 멀리해야 하지만 진붕은 가까이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형법 역할을 했던 『대명률(大明律)』 간당(奸黨)조는 “붕당을 결성해 조정을 문란하게 하는 자는 모두 목을 베고, 처자는 종으로 삼고 재산은 관에 몰수한다”고 규정해 붕당 결성을 사형으로 다스렸다.

 영중추부사 이준경(李浚慶)은 선조 5년(1572) 죽음을 앞두고 유차(遺箚)를 올려 “사사로운 붕당을 깨뜨려야 한다(破朋黨之私)”면서 그렇지 않으면 “끝내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 유차는 사림들의 지지를 받던 이이(李珥)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응교(應敎) 이이가 “진실로 군자라면 천백 사람이 무리를 짓더라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지만 소인이라면 한 사람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 상소를 올렸다.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당(自黨)은 진붕(眞朋)이고 상대당은 위붕(僞朋)으로 공격한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 정당들이 총체적 위기에 빠진 이유는 도(道)가 아니라 사익을 추구하는 위붕으로 보는 시각이 많기 때문이다. 사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가 도(道)다. 임진년 새해에는 진붕으로 거듭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희망이 될 수 있기를.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