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종철 사건 알린 숨은 주역 둘 … 25년 만에 추도식 자리 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이부영 전 의원(가운데)이 14일 추도식 단상에서 1987년 당시 영등포교도소의 안유 보안계장(왼쪽), 한재동 교도관(오른쪽)과 경찰의 은폐·조작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한영익 기자]

14일 서울 용산구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공 시절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리던 이 건물 앞마당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1987년 당시 23세,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씨의 25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이날 추도식에는 경찰의 사건 은폐·조작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기여한 안유(68)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과 한재동(65) 전 교도관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이들은 이날 이부영(70) 전 의원과 함께 단상에 올라가 당시 이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특종 보도했던 본지 신성호 전 수석논설위원.

 87년 1월 17일 새벽. 대공분실에 근무하던 조한경 경위 등 두 명이 고문치사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왔다. 대공분실 측은 조 경위 등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교도소로 찾아와 특별 면회를 신청했다. 그리고 “면회실에 교도관도 들어오지 말라”고 요구했다. 교도소 규정에 어긋나는 요구였다. 그러나 안씨는 면회 과정을 지켜봤다고 한다.

 “‘면회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제시했지요. 그때서야 박종철이라는 서울대생을 물고문해 숨지게 한 경관이 세 명이 더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됐습니다. 대공분실 관계자들이 1억원을 들먹이며 회유하려 했고, 협박도 했었죠.”

아직 마르지 않은 아버지의 눈물 14일 서울 옛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씨 25주기 추도식에서 박씨의 아버지 박정기(82)씨가 행사 도중 눈물을 닦고 있다. 이날 추도식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함세웅 신부, 명진 스님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이 무렵 이 전 의원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이 전 의원은 “같은 건물에 있던 조 경위 등이 안절부절못하며 흐느끼는 소리가 벽을 넘어 들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70년대 수감됐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안씨에게 사건에 대해 물었다. 안씨는 자신이 면회 때 들은 내용을 이 전 의원에게 전해줬다.

사건이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 전 의원은 교도관 한씨에게 “펜과 종이를 달라”고 부탁했다. 구치소 규정 위반이었지만 한씨는 근무용지를 서너 장 찢어 볼펜과 함께 건네줬다.

 박종철씨 치사 사건을 기록한 이 전 의원의 편지는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전병용씨와 김정남씨의 손을 거쳐 함세웅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에게 전달됐다. 사제단은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사건의 전말을 세상에 알렸다.

 안씨와 한씨는 사건 이후에도 교도소에서 계속 근무했기 때문에 이 전 의원을 도운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이 전 의원은 “이번 추도식에도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내가 행사 직전까지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당시 사건을 조작하려던 모습을 목격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민주화에 작은 보탬이라도 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본지는 박종철씨 고문 치사 사건을 이튿날인 87년 1월 15일 ‘경찰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2단 기사로 특종 보도했다. 당시 본사 사회부 기자로 이 사건을 취재했던 신성호(56) 전 수석논설위원은 지난해 퇴직한 뒤 ‘민주화 과정에 박종철 사건 탐사보도가 미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본지 보도 직후 15일 저녁에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져 숨졌다”는 수사 결과 발표를 했던 강민창(80) 당시 치안본부장(현재의 경찰청장)은 현재 부인의 병 간호를 하며 지내고 있다.

강씨는 본지와 전화 통화에서 “관계기관과 대책회의를 해서 결정난 대로 따랐다”며 “나도 국가로부터 피해를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93년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김민상·한영익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