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렁뚱땅 벤처들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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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업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닭장 같은 좁은 공간에서 하루 10시간, 혹은 그 이상을 일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불 같은 열정이 없으면 버틸 수도, 삶의 의미도 찾기 힘든 생활 패턴이다. 이러한 열정이 바로 진정한 벤처의 힘이다.

닷com 아니라 닷gone?

웹 에이전시(Web agency)라는 개념의 사업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났다. 초기에는 단순한 홍보용 홈페이지의 웹 디자인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기업의 e-비즈니스 구현을 총제적으로 서비스하는 영역의 회사로 자리잡았다. 돌이켜보면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위기가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직원들의 월급을 약속한 날짜에 주지 못했던 때도 있었고, 밀린 식대를 갚지 못해 회사 근처의 식당을 피해 다니기도 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그렇게 절박한 상황을 이겨냈기 때문에, 내일의 계획을 구상할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근래에 테헤란로를 떨게 만들고 있는 벤처 위기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른바 닷com이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닷gone이 됐다고 비꼬듯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IMF로 실업과 노숙자, 증시 붕괴 등의 우울한 사회 현상들이 온통 신문의 주요 지면을 장식할 때, 한국 경제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벤처 열풍’과 ‘벤처 신화’를 창조했던 한국의 벤처 기업들.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던 그 한국의 벤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현 벤처 위기 상황은 금융시장의 불안에서 촉발됐다고 보는 시각이 적절할 것 같다. 대우-현대로 이어지는 금융시장의 경색으로 자금난이 압박되고, 더불어 코스닥의 곤두박질로 투자 분위기가 크게 위축되었으며, 과대 포장되었던 벤처 거품의 반작용으로 기업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인 경제 동향에 의한 것도 벤처 위기의 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에 비견하여 업계 내부의 문제도 심도 있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할 것 같다. 누구는 누구의 인맥이라든가, 모 회사는 모 투자회사 계열이라든가, 끼리끼리 삼분을 했다든가, 편을 가르고 라인을 만들고 하는 문제들. 또, 과일 나무를 심고 가꾸는 문제보다는 그 열매를 따서 나눠먹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게 되고, 비정상적인 방법이 횡행하게 되었으며, 기본보다는 기교에 비중을 두지 않았는지 되짚어 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정책들이 발표되고 있고, 벤처 기업들 나름대로 자율적 M&A를 통한 활로 모색에 적극적이어서 다행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소위 한국인 특유의 ‘심리 게임’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속단을 내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물론 건전한 수익모델을 갖고 있는 벤처 기업이나, 지속적인 연구·개발에 힘을 쏟아 탁월한 기술력을 갖고 있는 회사들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차별화 된 경쟁력을 갖고 있지 못한 벤처 기업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업활동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만 화려하게 치장해서 주식 상장으로 돈을 벌어 보겠다는 회사들이 과연 한둘이겠는가! 그 중에는 무늬만 벤처인 회사도 있고, 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한 ‘얼렁뚱땅 벤처’도 있을 것이며, 벤처의 탈을 쓴 ‘벌처’도 있을 것이다. 옥석을 가려내서 투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자정 노력과 변화가 필요할 때라고 생각한다.

삼성을 위시한 대기업들의 벤처 사업 진출과 오프라인에서의 강세를 온라인으로 가져오려는 중견 기업들도 많다. 본격적인 경쟁 체제에 돌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차피 쓰러질 벤처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과열 열기로 닷com 간판만 붙이면 돈을 싸들고 돌아 다니던 투자사들의 구애에 행복해 하던 시절은 끝났다.

벤처 업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닭장 같은 좁은 공간에서 하루에 10시간, 혹은 그 이상을 일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밥 먹으러 식당에 갈 시간이 아까워 김밥이나 자장면으로 때우기도 하고, 월, 화, 수, 목, 목, 목, 목이라는 말도 한다. 불 같은 열정이 없으면 버틸 수도, 삶의 의미도 찾기 힘든 생활 패턴이다. 그러한 열정이 진정한 벤처의 힘이며, 한국인의 저력이 아닐까. 이제는 진짜 벤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만 남아야 할 때다. 껍데기는 가야 한다. 살아 남는 벤처들은 사회적인 소명의식과 그 이후를 차분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일확천금이나 지위, 명예가 아니라 일의 성취를 통한 나눔의 문화에 관심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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