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의 ‘여자는 왜’] 가끔 남자가 울컥해질 때 여자여, 말없이 안아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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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조현 소설가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저자

결혼을 앞둔 후배 L에게 언제 여자친구 S에게 청혼할 결심을 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갑작스러운 한파에 코가 알싸해지던 연말이었다. 그 즈음 한 여성지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주제로 한 짧은 글을 부탁받기도 했으니 새삼스레 L의 청혼 순간이 궁금해진 것.

 “일전에 회사에서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엎어져 상사에게 결재판 모서리로 머리를 쥐어박혔죠. 그날 망설이다가 울컥했던 맘을 S에게 털어놓았는데, 피식 웃더니 팔짱을 껴주는 거예요. 그 순간 그 애가 나만의 프로방스로 느껴졌는데 그때였던 거 같아요, 헤헤.”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던 L은 유난히 추위를 타서 햇볕이 풍성하다는 프로방스를 무척이나 동경했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대한 얘길 많이 들었다. 탁 트인 벌판을 칭송하는 고전소설부터 투명한 햇살이 포도원을 비추는 멜로영화까지 말이다. 그런 작품의 결론을 보면 그곳에선 삶의 모든 피로가 풀릴 수 있다는 거다. 그런 안정과 위로가 샐러리맨 L이 기대했던 결혼의 풍경이었던 것이다.

 L의 센티멘털리즘에 시나브로 동화된 난 얼마 후 S에게 같은 상황에 대해 물었다. “아, 그때요? 날도 추운데 길거리에서 구질구질한 얘길 하더라고요. 더 듣기 싫어서 어서 가자고 팔짱을 꼈는데 갑자기 정색을 하고 결혼하자고 해서 ‘깜놀’했죠. L이 승진하면 할까 했는데 뭐 나이도 있고 해서 가만히 있었죠.” 헐. 이럴 때 여자는 이해 곤란하다. 남자의 판타지에 이렇게 현실적인 계산법이라니. 물론 다시 만난 L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완벽해 보이는 프로방스에도 구질구질한 뒷골목이 있고, 카메라를 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관광객들 뒤로 생활에 찌든 농부나 소시민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테다. 그러니 결혼이라고 별다를 것은 없을지도. 뭐 그건 그렇고, 가끔 남자가 울컥해질 때 여자는 입을 놀릴 필요는 없다. 다만 팔짱을 끼거나 안아줄 것.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자신만의 아늑한 유토피아를 여자에게서 잘들 찾아낸다. 그거면 족하다. 통조림으로 된 남프랑스의 햇볕이 있으면 사고 싶은 아침에 이렇게 생각한다.

조현 소설가·『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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