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 경제] '신용평가' 가 나쁜 기업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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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현대사태' 라는 말을 못 들어본 틴틴 친구들은 없겠죠? 4월말 현대투자신탁이라는 금융 계열사의 자금 사정이 나빠진 뒤부터 줄곧 나라 경제가 기우뚱거렸으니까요.

주식값은 계속 떨어지고 중견 기업들은 회사채를 발행하지 못해 자금난에 시달려왔죠. 그런데 이달 초 현대가 자구계획이라는 걸 발표한 뒤에는 현대건설.상선.자동차 등 계열사 주가가 오르고 자금사정도 나아지고 있다고 해요.

정부의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현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약속(자구안)을 서둘러 발표한 계기가 뭐였는지 아세요□ 바로 한국기업평가라는 신용평가기관이 지난달 하순 현대그룹 8개 계열사 신용등급을 떨어뜨린 '사건' 때문이었죠.

여러 단계도 아니고 딱 한단계 낮췄을 뿐인데 정부도 못한 일을 어떻게 일개 신용평가회사가 해냈을까요. 아무래도 신용평가가 무언지 무척 궁금할 것 같아요.

지난번에 국가 신용등급을 배울 때 무디스나 S&P라는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이 있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 이런 기관들이 국가는 물론 기업과 금융기관.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이들이 발행한 각종 채권의 위험도을 평가하여 발표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신용평가입니다.

이들 기관들이 한 나라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는 조치를 취할 경우, 환율과 주가가 떨어지고 국제금융시장에서 해당 국가의 채권값이 떨어져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는 등 파장이 큽니다.

반대의 경우엔 그 나라에 유리해지겠죠.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도 비슷한 영향을 미쳐요. 신용도가 올라간 기업은 빚을 낼 때(채권 발행)싼 이자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용도가 내려간 기업은 비싼 이자를 물고도 돈을 빌리기 어려워지죠.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신용등급 하락이 놀랄 만한 일이었던 건 두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새로 받은 현대건설 회사채의 등급이 BB+라는 거예요. 신용평가기관들이 매기는 신용등급은 무려 19~25개나 되는데 크게 나누면 투자적격 등급과 투기 등급으로 나눌 수 있어요.

여기서 투자적격 등급 회사채는 돈을 떼일 염려가 거의 없다는 뜻이고 투기 등급은 자칫하면 이자뿐 아니라 원금도 찾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의미죠.

그런데 BB+ 등급은 바로 투기 등급이 시작되는 단계예요. 이 경우 이자를 노리고 채권을 사는 투자자들이 현대건설의 회사채를 사려고 하지 않겠죠□기업들은 항상 공장이나 다른 투자를 위해 돈을 빌려다 써야 되는데 회사채를 발행하기 어려워지면 금방 곤란을 겪게 됩니다.

장부상으로 돈되는 재산(자산)이 많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땅이나 건물, 또는 외상으로 물건을 판 돈이기 때문에 곧바로 팔아 빚을 갚기도 어렵답니다.

또 한가지는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이 특히 다른 형제 회사의 주식을 많이 갖고 있다는 점이예요. 최악의 경우 현대건설이 부도나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대주주가 되면 다른 형제회사도 덩달아 은행들 소유가 될 우려가 높아집니다.

자, 이쯤 되면 신용평가의 위력이 실감나죠.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신용평가는 그동안 문제가 많았답니다.

신용평가가 정확해지려면 기업이 가진 재산(자산)과 빚(부채)이 얼마인지를 알아야 하고 장사가 잘 돼 현금을 많이 버는지(수익률)등을 모두 알아야 해요. 세계적인 신용평가사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직원들의 사기까지 점수를 매긴다고 할 정도니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짐작을 할 거예요.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신용평가는 사실 기업의 덩치에 맞춰 신용도를 매기기 일쑤였습니다.

대기업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란 믿음 때문이었죠. 기업들도 비밀이 새나간다고 해서 평가에 필요한 자료를 제대로 내놓지 않았어요.

이 때문에 한보.기아 같은 부실기업들이 투자적격 등급으로 평가받고 마음대로 채권을 팔아 돈을 끌어쓰다가 부도를 낸 거예요. 이런 회사들로 인해 나라 경제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죠?

이런 면에서는 IMF(국제통화기금)가 톡톡히 약이 됐어요. 기업들이 내부 사정을 투명하게 시장에 알리기 시작했고 신용평가기관들도 세계적인 기관들과 손잡고 공정한 평가에 나서게 됐죠. 그런 변화들이 쌓인 끝에 현대라는 대기업의 변화까지 이끌어내는 힘을 갖게 된 거예요.

자, 이제 신용평가가 뭔지 감이 잡히나요? 한마디로 신용평가는 자본시장의 신호등이고 신용평가기관은 문지기 역할을 하는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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