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선 소장의 한국 자동차 비사(秘史) ⑩ 그 옛날 자동차의 고생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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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우리나라는 도로 사정이 열악해 비 오는 날이면 도성을 조금만 벗어나도 진창길이었다.
한 행인이 진흙에 빠진 자동차를 빼내기 위해 소에 멍에를 씌우고 차량에 밧줄을 달고 있다.

“여보, 자동차 타이어가 흙탕에 빠졌어요.”

 “알고 있소. 정말 비 오는 날 신촌 길에서 자동차 운전하기 힘들어요. 온통 진창길이야.”

 1920년대의 우리나라 도로는 비만 오면 질퍽한 수렁으로 변했다. 서울의 경우 종로나 남대문, 을지로 등 도성 안 도로는 그런대로 포장을 했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흙 길이라 소나기나 장마철이면 온통 진창으로 변했다.

 특히 서울 신촌의 길은 비만 오면 장안 어느 곳보다 진창이 되기로 유명했다. 이 시절 서울의 미국인 선교사들은 신촌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주변에 많이 모여 살았다.

 비만 오면 선교사들은 소가 달구지를 끌 때 사용하는 멍에와 밧줄을 아예 차에다 싣고 다녔다. 진창길을 헤쳐 나가다가 잘못해 깊숙이 빠져 꼼작할 수 없게 되면 지나가는 소를 붙들고 통사정해 멍에를 소에게 씌우고 밧줄을 달아 차를 끌어냈다.

 “허허, 저 양코배기 자동차가 또 진창 깊숙이 빠져 쩔쩔매는구먼.”

 “헬로, 조선 양반. 나의 자동차가 깊이 빠졌습니다. 당신의 소 좀 빌려 주십시오. 나 도와주시오, 큰일이 났습니다.”

 “알았수, 헬로 양반. 가만히 계시우. 그런데 멍에와 밧줄 있수?”

 “예스. 예스,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지방으로 자주 전도여행을 가야 하는 선교사들에게는 자동차는 절대 필요한 교통도구였다. 한번 여행을 가자면 자동차에 챙겨야 할 필수품만 해도 한 차가 넘었다. 서울의 길이 이 모양이니 지방의 도로사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소 멍에는 물론 삽·곡괭이·도끼·톱에다가 휘발유통·스페어타이어 서너 짝은 기본이었다. 험한 길을 달리다 보면 스프링이 부러지기 일쑤여서 스프링 등 정비용 부속품들을 한 보따리 챙겨 얹었다. 다리 없는 깊은 개울을 건너기 위해 길고 튼튼한 널빤지 두 쪽까지 싣고 다녔다.

 선교를 하려면 자동찻길이 없는 산간벽지도 가야 했는데 이런 곳에서는 오솔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무나 풀이 우거진 길을 차가 갈 수 없어 도끼나 톱으로 나무를 잘라내고 낫으로 풀을 베고 곡괭이와 삽으로 길을 넓히거나 흙을 퍼다 도로를 만들어가며 차를 타고 다녔다. 이래서 선교사들은 조선 땅에 와서 자동찻길을 개척하는 데도 한몫을 한 이방인들이었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편집자 주: 전영선 소장의 한국 자동차 비사가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관심과 사랑을 아끼지 않은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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