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MB의 마지막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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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안희창
수석 논설위원

“이명박(MB) 대통령은 참 운이 좋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급서(急逝)하자 시중에 떠도는 말 중의 하나다. 일파만파로 확산되던 친인척 비리가 수면 하로 잠복되어가는 것을 의식한 발언일 게다.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는 것 같다. 소통 부재, 끼리끼리 인사, 부정부패로 속절없이 추락할 것이 확실시되던 MB정권이 김 위원장의 사망으로 기존 악재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가진 것만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대통령이 이번 기회를 통해 국민적 지지를 회복할 수 있느냐다. 이는 MB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 국내외적으로 ‘통찰력 있고 용기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김정일이 사망한 현 시점에서 남북한 각기의 국내 상황과 미·중 관계 양상은 과거와는 근원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김 위원장이 사망해도 아들이 승계했기 때문에 노선상의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완벽하게 철권통치했던 그의 부재(不在)는 원천적으로 ‘새로운 통풍장치’가 들어서는 여지는 있을 수 있다. 특히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개혁개방이나 대남노선에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 남한은 이미 변했다. 반공 위주의 권위주의 정권이 득세하다가, 이제는 북한을 가급적 이해하려는 세력의 비중이 그렇지 않은 세력과 엇비슷해졌다. 어느 쪽이 ‘힘으로만’ 상대방을 제압하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지난 60여 년에 걸친 남북대결 국면에서 미·중 관계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를 겪었다. 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와 결코 선두에 서지 말라는 ‘결부당두(決不當頭)’를 외교노선으로 삼던 중국이 이제는 막강한 경제력을 토대로 미국에 큰소리치는 G2 국가가 되었다.

 한마디로 대북정책을 비롯한 대미·대중 정책을 도식적 차원에서 추진하면 문제 해결이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한 예로 김정일 사망에 관한 사전인지 대목을 들 수 있다. 미국이 모르고 있었던 이 소식을 사전인지한 중국의 국가주석이 한국 대통령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통일문제를 포함한 대북정책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관점’에서 대외정책을 추진할 시점이 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김 위원장의 사망을 대북관계의 리셋(reset·다시 맞추기) 기회로 삼고, 조문 문제 등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바람직했다. 우리 내부의 갈등을 상당히 줄일 수 있게 되었고 북쪽도 대남관계의 리셋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 관건은 김 위원장 사망으로 북한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다.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주목할 만한 주장을 했다. 북한의 신지도부가 미국과 한국의 지원을 통해 자신들의 경직된 체제를 바꾸려 하는데 중국이 반대할 것이라는 견해다. 북한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북한을 ‘새로운 중국의 성(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선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 진전이다. 그러나 해결 방안은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협조 요청하면 한·미 동맹 문제를 거론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MB의 결단과 설득 능력이 요구된다. 그동안 쌓아놓은 미국과의 돈독한 유대를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한·미 동맹의 청사진을 일구어내고 중국을 설득하는 것이다. 물론 중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중국이 도를 넘어서면 거부해야 한다. 한국에는 한·미 동맹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미 동맹이 튼튼해야 중국이 한국을 깔보지 않는다’는 주장은 효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이 1년 넘게 남은 재임기간 중 이 사안에서 성과를 낸다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안희창 수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