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실패하면 3류 국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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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은 구색 맞추기나 시늉만으로 달성되는 게 아니며, 연습도 용납되지 않는 진검(眞劍)승부다."

급성 맹장염으로 입원중 퇴임하게 된 이헌재(李憲宰)전 재경부장관은 병상에서 굳이 이임사를 직접 적어내렸다.

이임사에는 '구조조정의 전도사' '금융황제' 란 극찬에서 시작해 '실패한 관료' 란 멍에를 지고 물러나게 된 지난 2년반의 소회(所懷)가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그는 "개혁만을 위한 개혁은 안되며, 아무리 중요한 개혁이라도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면서 "그것만이 국민을 위한 공직자의 책임이고 진정한 용기" 라고 강조했다.

여기에는 '정책혼선' '경제팀 불협화음' 등 지난 몇달간 자신에게 퍼부어졌던 비판을 겨냥한 불만이 담겨있다.

李장관은 평소 "개혁은 달리는 기차를 멈추지 않고 기차바퀴를 수리하는 것과 같다" "개혁은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하는 것" 이라며 환자(시장)의 상태에 맞춰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개혁처방론을 펼쳐 왔다.

그는 자신의 처방이 '원칙이 없다' '지지부진하다' 며 매도당할 때면 측근들과 폭탄주를 돌리며 "칼 자르듯 기업.금융을 재단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개혁이 아니라 환자(시장)를 죽게 만드는 혁명" 이라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는 금감위원장이던 1998년 5개 은행을 퇴출시킨 것을 시작으로 3백여개의 금융기관을 정리했다. IMF의 고금리 처방에 맞서 저금리 정책을 밀어붙여 관철시킨 것도 그다.

저금리 정책은 1백조원의 빚덩어리 대우그룹을 시장에서 처리하고, 재벌의 부채비율을 2백% 아래로 떨어뜨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채권시가 평가제' '뮤추얼펀드' '발행시장 채권담보부채권' 등을 고비마다 내세워 꽉 막힌 시장의 돈줄을 풀기도 했다.

덕분에 외신으로부터 '구조조정의 거인' 으로 불린 李장관을 물러나게 한 것은 역설적으로 7일 단행된 '개혁을 위한 경제부처 개각론' 이었다.

재경부 관계자는 "李장관은 정치논리의 희생양이었다" 며 지난 4월 총선때 야당의 국가채무 4백조원 논쟁을 예로 들었다.

당정에 변변한 연줄이 없던 李장관의 소신과 유연함은 그후 '안이함' 과 '책임회피' 로 전락했다.

李장관은 이임사에 "구조조정이 실패하면 우리나라는 영영 3류국가로 전락하게 될 것" 이라는 구절을 넣었다.

자신이 시작한 금융.기업 개혁의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물러나는 아쉬움과 울분을 후임자에게 경고와 당부로 대신한 셈이다. 그러나 입원실의 李장관은 이임사를 끝내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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