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속의 욕설

중앙일보

입력

1980년대 초 나는 대학생이었다.도서관의 책 냄새보다는 최루가스 냄새를 훨씬 많이 맡을 수 밖에 없었고 정치 권력에 대해 무한히 비판적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어느 늦은 밤 한적한 시장 골목을 지날 때였다. 청과물 장사로 보이는 듯한 허름한 옷차림의 어떤 아저씨 하나가 빈 과일 궤짝 하나를 하늘 높이 번쩍 쳐들더니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면서 골목이 떠나가라 외쳤다.

"X-발, 대한민국 X같네."

엄청난 욕이었고 국가모독의 불경한 발언이었지만, 그 절규에 가까운 욕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내 머리 속이 환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욕설은 지금까지도 내게 대단히 설득력있는 정치적 발언으로, 절절한 개인적 신세한탄으로,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짧은 시로, 폭력적 혹은 파괴적 행위라기 보다는 아름다운 퍼포먼스로 남아있다.

그 욕은 내게 포복절도할 우스움과 엉엉 울고 싶을 정도의 슬픔을 한데 뒤섞은 듯한 묘한 느낌을 주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보고난 느낌이 바로 이랬다.

영화 〈죽거나…〉의 대사는 태반이 욕이다.

그러나 그 욕은 단지 입으로 내뱉는 발화라기 보다는 온몸으로 내뿜는 처절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그 욕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절규이기에 관객과 즉각적이고도 완벽한 소통을 이뤄낸다.

물론 욕지꺼리가 나오는 영화는 많다. 하지만 예컨대 〈주유소습격사건〉이나 〈넘버3〉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양아치'들의 욕은 우리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왠지 겉돈다.

배우가 양아치 역을 연기하는 가짜임이 즉각 느껴지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영화의 욕은 진짜다.

나는 감독 류승완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의 성장 배경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진짜 양아치 짓 좀 해본 놈(양아치는 '놈'이라고 불러주는 게 '예의'일 것이다)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 속의 그들은 (혹은 우리는) 왜 욕을 하는 것일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머리도 나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뒤집을 만한 어떠한 효과적인 저항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하나 만큼은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깡패들의 싸움 이야기이지만 폭력적이지 않다. 노출의 정도 자체가 곧 음란물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치고 받고 싸우는 싸움 자체가 곧 폭력물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피범벅이 되어 한데 뒹구는 형사와 건달이 보여주는 것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삶에 부대끼는 모습 그 자체이고, 격투라기보다는 서로 부둥켜안고 외로움을 달래는 연인간의 정사 장면에 더 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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