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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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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오늘 우리는 슬픔 속에 시대의 거목(巨木)을 떠나 보낸다. 포스코를 세운, 아니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청암(靑巖)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어제 타계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품은 ‘짧은 인생 영원한 조국에’라는 좌우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몸을 던졌고, 포스코를 세워 산업화를 이끌었으며, 미래를 내다보며 포스텍을 세웠다. 국가가 부를 때마다 언제 어디서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동상에 새겨진 ‘鋼鐵巨人(강철거인) 敎育偉人(교육위인)’이란 여덟 글자가 오롯이 그의 인생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떠나는 그에게 감히 ‘영웅’이란 헌사를 바치고 싶다.

 국무총리·여당 대표 같은 화려한 경력에 앞서 청암의 일생은 포스코(포항제철)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1968년 4월 1일, 그는 대일 청구권 잔액으로 “경제적 타당성도 없고 절대 불가능하다”는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항의 허허벌판에 종합제철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철(鐵)은 산업의 쌀”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 아래 “실패하면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우향우(右向右) 정신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 포스코는 철강 불모지에서 연산 3000만t이 넘는 세계 최고의 종합제철회사로 우뚝 섰다. ‘한국의 철강왕(王)’ 박 명예회장이 아니라면 꿈도 못 꿀 기적이다. 그는 92년에야 박 대통령 영전 앞에서 “각하, 명 받은 지 25년 만에 포철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음을 보고 드립니다”며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청암은 미래의 흐름을 내다본 위인이었다. 86년 기술개발과 인재 양성을 위해 과감하게 포항공대(포스텍)를 세웠다. 우리 젊은이들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가 세운 포스텍은 한국의 대학 역사를 새로 썼으며, 단기간 내에 세계적 이공대학으로 발돋움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해외에서 더 높다. 78년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에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하지만 80년 그의 폐에서 처음 종양이 발견됐다. 제철소 현장에서 숱하게 마신 모래, 정치하면서 쌓인 온갖 먼지들 탓이었다. 그는 2000년 물혹 제거 수술을 받아 건강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결국 폐 손상으로 타계했다. 무쇠 같던 육체와 집념도 결국 죽음을 비켜가지 못한 것이다.

 이제 청암은 역사를 쓰고, 신화(神話)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 그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는 것은 남은 우리들의 몫이다. 청암은 2004년 중앙일보의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는 제목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절대적 절망은 없었다. 깜깜한 어둠을 헤쳐온 우리나라다. 맨주먹으로 오늘을 건설한 우리가 아닌가. 역사는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자의 몫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이제 우리는 시대의 거목을 떠나보내야 한다.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며 그가 못다 이룬 유지(遺志)를 받들어 빛나는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임을 다짐한다. 부디 편히 영면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