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대한민국 판사들의 현 주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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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조강수
사회부문 기자

10여 년간 법원의 판사들을 취재하면서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대부분의 법관이 정치적으로나, 사건 내용 면에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며 질문을 피해갔다. 판사들은 법률에 의거해 누구에게나 공평한 재판을 할 뿐이지 어떤 식으로든 사적인 견해를 외부에 밝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요즘은 확 바뀐 법원의 현실에 어리둥절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페이스북이라고는 하지만 최은배(45)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최근 “뼛속 깊이 친미인 대통령과 통상관료···”라는 글을 통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최 부장판사는 지난 8일에는 ‘민주노동당에 불법 후원금을 낸 교사에 대한 징계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통해 소신의 일단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이 판결문에는 “야당에 대한 후원금 납부를 징계할 경우 정권의 탄압으로 비쳐질 수 있으므로 여당에 대한 기부와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판사 스스로 ‘대상에 따른 차별적 징계’를 언급한 것이다. “교사들의 소액 후원금 납부는 실정법으로서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것이지만 직무와 무관해 징계 사유는 아니다”는 판단은 일반인이 봐도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튿날 같은 법원 김하늘(43) 부장판사가 대법원에 제출한 ‘FTA 연구모임 구성 건의문’에는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서부 시대 총잡이’에 빗댄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2000년대 들어 전 세계 ‘수퍼파워’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총잡이’라는 비유가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사기에 충분했다.

 서기호(41) 북부지법 판사가 지난 7일 페이스북에 ‘가카’ ‘쫄면’ ‘빅엿’ 등 저속한 인터넷 표현을 사용해 이명박 대통령을 조롱하는 글을 올려 경박하다는 비판까지 자초했다. 서 판사는 지난해 글자 수가 72자밖에 안 되는 판결문을 써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기자는 최근 법원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돈을 보면서 법원 환경이 급속도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절감하면서도 한편으론 대한민국 판사들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분쟁을 해결해야 할 판사들이 분쟁의 진원지가 되고, 절제되지 않은 논리와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판사들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해야 하는 직업이다. ‘판사가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재판의 권위가 선다’는 말의 의미가 요즘 절실하게 느껴진다.

조강수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