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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서 폴란드까지 … 푸틴, 신러시아 제국 건설 야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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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8일로 소련이 해체된 지 20주년을 맞는다. 러시아는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대혼란을 겪었지만 고유가에 힘입어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는 등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5일 모스크바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야당 당원들이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모스크바 AP=연합뉴스]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 비극이다.”

 내년 3월 4일 치러지는 러시아 대선에서 승리할 것으로 보이는 블라디미르 푸틴(59) 총리의 말이다. 21세기판 차르(황제)를 꿈꾸는 푸틴은 기회 있을 때마다 소련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발언을 노골적으로 하면서 신러시아 제국 건설의 야욕을 드러내왔다. 8일로 소비에트 연방 해체가 결정된 지 20년을 맞는다. 붕괴 20주년을 맞은 지금 러시아에선 ‘소련 부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00년부터 8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했던 푸틴이 내년에 다시 ‘대관식’을 치르게 되면 폴란드 국경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새로운 대제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할 전망이다. 푸틴은 당선되면 6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연임할 수 있다.

 ◆소련 부활 꿈꾸나=푸틴은 지난 10월 초 유력 일간지 이즈베스티야에 ‘옛 소련 국가들의 유라시아 연합’ 결성을 촉구하는 글을 기고했다. 이들을 다시 통합해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 소장인 드미트리 트레닌은 “20세기 제국을 상실한 지 20년 만에 러시아가 다시 새로운 형태의 통합을 향해 움직일 준비가 돼있다”고 지적했다.

 옛 소련에 속했던 러시아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정상들은 지난달 18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유라시아 경제통합에 관한 선언서’에 서명했다. 이들 세 나라는 내년 1월 1일 관세 장벽을 없애고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단일경제공동체(CES)를 출범시킨다. 이를 주축으로 나머지 소련권 국가들의 가입을 늘려 2015년까지 유럽연합(EU)과 비슷한 성격의 ‘유라시아 연합’을 창설할 계획이다.

 ◆러시아의 화려한 부상=이런 야심 찬 구상은 소련 붕괴 후 한때 휘청거렸던 러시아가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초대 보리스 옐친 대통령(1990~99년)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러시아를 다시 글로벌 강국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은 푸틴이다. 고유가에 힘입어 러시아는 2000년부터 9년 연속 평균 7%대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지난 4년간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인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을 일시 물려주기는 했지만 푸틴은 그동안에도 사실상 러시아 최고지도자로서 군림해왔다. 미국과 유럽발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동유럽이나 옛 소련권에서 경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경제 안정에 따른 자신감 회복으로 국제무대에서의 러시아 발언권은 날로 커지고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달 “우리는 거대한 스케일로 행동하는 데 익숙한 나라”라 고 말했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장기 침체에 빠져있는 미국과는 정면 대결을 피하지 않고 있다. 푸틴은 미국을 세계 경제의 ‘기생충’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미국이 동유럽에 미사일방어(MD) 시스템 구축하는 계획을 취소하지 않을 경우 새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에서 탈퇴할 수도 있다고 위협한다. 이를 두고 이즈베스티야지는 “메드베데프가 (미국과의) ‘리셋(재설정)’ 정책을 포기했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시리아·이란 등 중동 문제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20년 전 탱크와 군인들을 철수시켰던 동유럽에서는 루블화를 앞세워 다시 진군하고 있다. 2008년까지 소련 붕괴 후 17년 동안 러시아가 동유럽에 투자한 금액은 24억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3년 투자액은 이보다 많은 28억 달러에 이른다.

 ◆아직도 산 넘어 산=러시아의 재부상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걸림돌이 널려있다.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최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엉터리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푸틴을 겨냥해 러시아 지도자들이 계속 지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지난 4일 치러진 하원 선거에서 푸틴의 통합러시아당은 과반에 턱걸이했다. 집권당이 선거 과정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도 제기돼 5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시내에서는 수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혁명을 이루자” “푸틴 없는 러시아를 원한다” 등의 구호가 난무했다.

 소수 정당인 야블로코의 대선 후보 그리고리 야블린스키는 “러시아인들은 푸틴의 통치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부패한 엘리트들이 에너지 수출로 벌어들인 부를 독차지하는 것을 보고 등을 돌리고 있다”고 비판했다(로이터통신).

 부패는 러시아의 가장 큰 고질병이다. 국제투명성기구가 지난 1일 발표한 2011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에서 러시아는 183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143위를 차지했다.

 석유·가스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제 구조도 불안 요인이다. 유가가 떨어지면 러시아 경제는 언제든지 침체에 빠질 수 있는 약점을 갖고 있다. 전문가들은 푸틴과 러시아의 미래는 결국 경제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다.

  정치평론가 키릴 로고프는 “전체적으로 지지율은 견고하지만 언제 먼지가 될지는 모른다”고 말했다(이코노미스트). 소련 붕괴라는 지각 변동은 20년 전에 일어났지만 그 여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경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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