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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분위기 식어도 벤처 열기 여전해요"

중앙일보

입력

33도를 웃도는 초여름 날씨. 그 날 테헤란 밸리는 유난히 뜨거웠다. 지난 해 말 닷컴 열풍은 노다지를 찾아 금광을 찾아나서는 '골드러시'처럼 달궈졌고, '묻지마 투자'는 끝없이 이어졌다. '거품 논쟁'은 그같은 무작정 열기에 이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거품 논쟁'의 상당 부분은 닷컴의 알맹이를 들춰보는 게 아니었다. 껍데기, 혹은 껍데기조차 멀리서 관망한 테헤란밸리 바깥에서 만들어낸 반응이었다. 그래서 지금 닷컴이 집중해 있는 테헤란밸리의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고들 한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의 역저 〈닷컴 쇼크〉(중앙M&B) 한권 달랑 들고 테헤란밸리 한 가운데인 삼성동 포스코빌딩 뒤편에 위치한 벤처 이네이블링(벤처기업의 창업에서부터 상장까지를 책임진다는 뜻) 그룹 '비엔씨아시아닷컴'의 김소연 대표를 찾아갔다. 약속 시간을 조금 넘어서 헐레벌떡 도착한 김 대표의 손에도 〈닷컴 쇼크〉가 들려 있었다.

- 계속 바쁘시군요. 좀 어때요. 잘 되세요?
"힘들어요. 분위기가 완전히 냉각 상태에요. 닷컴 이름만 보고 그냥 돈을 쏟아붓던 투자자들이 이제는 아무리 경쟁력을 갖춘 아이템이라 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심지어 요즘은 창업 계획서를 가지고 그 계획의 심사를 받는 데에도 일정 액의 심사비를 제출해야 할 정도예요. '묻지마 투자' 시절과는 딴판이죠."

- 그럼 초기 투자부터 책임지겠다는 김소연대표 하는 일이 누구보다 힘들어졌겠네요.
"그런 셈이에요. 인터넷 벤처는 특히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인터넷은 사실 생산이나 물리적 기반은 아니잖아요. 인터넷은 기반 시설에 힘을 불어넣는 하나의 미디어일 뿐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인터넷 벤처에 대한 투자에 더 냉담한 것 같아요."

- 그렇군요. 어쩌면 그건 지난 해 말 우리 사회에서 인터넷에 대한 열기가 너무 갑작스럽게 끓어오른 데에 대한 반발 작용 아닐까요? 출판 경향에도 그런 게 나타나요. 이를테면 지난 해 말부터 올 봄까지는 〈e 비즈니스닷컴〉(21세기북스), 〈인터넷 비즈니스.com〉(영진닷컴) 같은 인터넷 비즈니스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또 그런 컨셉으로 나오는 책들마다 베스트 셀러 대열에 올랐지요. 그러다가 한 동안 인터넷 비즈니스에 대한 책들이 뜸 했어요. 최근 갖가지 인터넷 벤처에 대한 불안한 이야기들이 나오더니〈닷컴 쇼크〉처럼 인터넷 벤처에 대한 종합적인 점검이나 진단을 주제로 한 책들이 나오고 있어요. 바쁘신 와중에 이 책은 읽을 시간이 있으셨나요?
"그래도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해 주셔서 읽을 수 있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예 책은 읽을 엄두도 내기 힘들어요."

- 이 책은 제목만 봐서는 인터넷 벤처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담긴 책으로 보이는데, 꼼꼼히 보니, 신문의 컬럼 정도의 가벼운 글이더군요. 이 책에서 필자는 벤처 기업에 대해 정부는 가만히 구경만 하고, 은행은 빨리 망하라는 식의 폭언도 서슴지 않더군요.

"그것 참 시원하더군요. 이 책은 일본의 상황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우리라고 별로 다를 게 없어요. 지금의 우리 벤처 기업들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한 일이 뭐 있어요? 벤처 기업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요? 벤처 기업에는 특별한 혜택이 그리 절실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쓸데 없는 규제를 먼저 풀어야 하지요. 그냥 놔 두면 된다는 이야기예요. 제 생각에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기업에 대한 혜택과 규제의 균형을 잡는 일이에요."

- 일본과 우리의 상황이 참 비슷하지 않나 하는 느낌을 주더군요. 여기서는 또 닷컴 기업의 성공 조건 가운데 하나로 전자 결제 시스템의 정착을 이야기합니다. 전자 상거래가 활성화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까닭이지요. 우리나라 상황은 어떤가요?

"그거야 공자님 말씀 아닌가요? 이른바 e-머니의 활성화지요. 예를 들어 보자구요. 저는 대개 밤 10시 정도나 돼야 대부분의 스케줄을 끝내고 한숨 돌리게 됩니다. 그러면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식사라도 하러 가게 되지요. 그때 마침 지갑에 현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카드를 쓰는 수밖에 없지요.

통장에 돈이 있어도 찾을 수가 없잖아요. 현금이라는 게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신용카드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용카드 역시 전자상거래에 들어가면 불편한 수단이 되고 맙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터넷 상거래는 카드로 결제합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불편해요? 저는 그래도 웬만한 신용카드의 번호는 다 외우거든요. 하지만 카드 유효기간은 못 외워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카드를 꺼내 보고 일일이 입력해 넣어야 해요. 하지만 전자결제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자기만의 전자지갑을 통해서 편하게 결제할 수 있겠지요."

- 보안 등의 문제로 정착되기에는 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인터넷을 처음 사용하던 95년 께를 돌이켜 보세요.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같은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사용자 수도 전혀 예상치 못했잖아요. 전자 결제 시스템도 마찬가지예요.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전자 지갑 등의 결제 시스템은 멀지 않아 정착되리라 생각해요."

- 이 책에서는 세계의 유명한 경영자들은 아침 일곱시 이전에 출근하는게 정상이라고 합니다. 미국인들이 아침 열시에 출근해 오후 네시에 퇴근한다고 알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더군요. 저자는 '진정으로 업적을 올리고 싶거나 경영을 개혁하려면 꼭두새벽부터 다음날 새벽 별을 볼 때까지 열심히 일한다. 그것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상식이다'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이야기지요. 테헤란 밸리의 사람들 중에는 정말 '퇴근'이라는 단어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가는 지쳐서 오래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최근에는 테헤란밸리로 들어와서 일하다가 몸이 못견뎌서 다시 대기업으로 돌아가는 유턴현상까지 보이는 것 아닌가요?

"물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에서 일하는 게 좋지요. 그러나 일반적인 개념의 행복이나 평안을 누리려는 성향의 사람은 아예 이쪽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런 생각을 갖고 오면 일하는 사람도 또 그런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도 모두가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에요. 희망, 의지, 열정, 그리고 희생 정신을 갖고 덤벼들어야 버틸 수 있는 곳이 바로 테헤란밸리입니다. 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달려들었다가 최근의 냉각된 분위기를 보고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은 이곳 생리에 맞지 않는 거예요."

- 김대표는 어때요?
"저야 뭐 벤처 1세대로 이미 오래 전부터 휴일이나 주말을 잊은 지 오래됐어요. 월급요? 돈 많이 받겠다고 이곳에 몰려 왔던 사람들은 차츰 떠나고 있잖아요. 월급 생각하고는 오래 못 버틴다니깐요."

꼭두새벽부터 다음날 새벽 별을 볼 때까지 일하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테헤란밸리의 닷컴 기업들. 우리에게 닷컴 쇼크는 어떤 의미였던가? 테헤란밸리는 누구나 아이디어만 가지면 캐낼 수 있는 노다지 광산이었던가? 금융구조 조정이라는 새로운 위기 국면에 테헤란밸리의 밤을 밝히는 벤처인들의 처절한 희망과 열정. 그 안에서 싹을 틔우고 키워 온 닷컴 쇼크. 인터넷 벤처를 꿈꾼 사람들보다 더 많은 테헤란밸리 바깥 사람들에 의해 부풀려져 온 우리의 닷컴 쇼크가 이제 다시 바깥 사람들에 의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영국의 팝 가수 엘튼 존을 좋아하는 김소연 대표에게 건넨 엘튼 존의 최근 음반 하나를 평안히 감상할 수 있는 그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을 남기며 자리를 일어서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포항에서 올라온 건설 노동자들이 포스코 빌딩 앞 대로 한 가운데서 아스팔트를 녹이는 듯한 무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도 열지 않는 승용차 운전자들에게 '실질 임금 보장하라'는 유인물을 나눠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테헤란밸리의 닷컴 쇼크는 점점 더 끓어 오르고 있지만, 그게 바로 시작이었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이 글에서 이야기한 책들
* 닷컴 쇼크 (오마에 겐이치 저, 이선희 역, 중앙M&B)
* e 비즈니스닷컴(척 마틴, 21세기북스)
* 인터넷 비즈니스.com(김진우, 영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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