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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들리는 포 소리에도 화들짝 … 주민들 ‘그날’ 트라우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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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1년이 되어가지만 포격으로 집을 잃은 주민들은 여전히 연평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마련된 임시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다. 18일 주민 박명선(64)씨가 임시주택에서 채소를 다듬고 있다. 포격 후 주인 없이 오랜 시간 홀로 지냈던 백구도 이젠 주인과 함께한다. [연평도=김성룡 기자]

18일 서해 연평도 당섬 선착장. 인천 연안부두에서 2시간여 파도를 헤쳐온 여객선에서 내리자 ‘연평부대 해병 장병 여러분, 정말 용감했습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한 해병 장병 아버지 이름으로 지난해 내걸린 이 현수막은 1년여의 시간을 말해주듯 색깔이 바래 있었다. 갯내음이 물씬한 포구에서는 그물에서 꽃게를 떼어내는 작업으로 바빴다. “많이 잡히느냐”고 할머니에게 묻자 “가을 꽃게잡이는 풍어”라고 말했다.

 1㎞ 길이의 연도교를 걸어 섬에 들어서자 지난해 11월 23일 북한의 포격으로 부서진 건물을 신축하거나 대피소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정부가 지원한 국고 309억원 중 40억원을 투입해 주택 19채를 새로 지었다. 13채는 입주를 마쳤다. 며칠 전 붉은 벽돌로 말끔하게 지은 집에 입주한 오연옥(74) 할머니는 “내 집으로 들어오니 이제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연평도 주민들은 지난해 포탄이 쏟아지던 날 밤 어선을 타고 섬을 떠나 3개월간 피란 생활을 했다.

 종합운동장 인근의 대피소 공사장에서는 콘크리트 타설 작업이 한창이었다. 다음달 완공되는 165~660㎡ 크기의 7개 대피소는 주방과 방송실, 냉난방·발전·급수시설 및 응급진료실을 갖추고 있다. 660㎡급 대피소에서는 배트민턴 운동도 가능하다. 이범형 옹진군 대피소팀장은 “국내 최초의 체류형 접경지 대피소로 포격 시뮬레이션까지 거쳤다”고 말했다.

‘해군 삼촌들 화이팅!’이란 글씨와 함께 군인 그림이 그려진 돌멩이가 연평초등학교 담장에 올려져 있다. 학생과 장병이 함께 그렸다. [연평도=김성룡 기자]

 주민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지난해 11월 1750명이던 것이 17일 현재 1898명이다. 최근 전입자 중에는 공사 일을 따라 온 사람이 많고 외지에서 와 숙박업소나 음식점을 연 이들도 있다. 섬 주민은 여객선 운임이 5000원이어서 주소를 옮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외지인들이 늘어나서인지 그전에는 없었던 24시간 편의점도 두 곳이나 생겼다.

 주민을 제외한 섬 방문객도 10월 말까지 2만9000여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7% 늘었다. 오병집 옹진군 부군수는 “관광 성수기 때 여객선 운임을 50% 지원해준 데다 안보체험 방문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섬 곳곳에는 아직도 포격의 상흔이 남아 있고 주민들도 ‘그날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보체험관 건립을 위해 보존된 완파 가옥 4채에서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포성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김정희(47·남부리)씨는 “예전에는 멀리서 포 소리가 들려도 훈련이려니 했지만 이제는 ‘그날’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더 불안해한다. 어린이 공부방을 운영하는 임모(35·여)씨는 “면사무소 스피커가 울리면 아이들이 ‘선생님 대피방송 아닌가요’라며 놀란다”고 말했다. 연평초·중·고교는 인천시교육청에 ‘학생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트라우마)에 대한 심리검사 외 상담’을 요청해놓고 있다.

 북한의 연평도 도발 1주년을 앞두고 연평도에서는 전쟁과 평화를 되새기는 작업이 한창이다. 1, 2차 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용사들의 흉상이 새겨진 평화공원에는 지난해 포격 당시 전사한 서정우 해병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흉상도 새겨졌다. 김치백·배복철씨 등 민간인 희생자 2명의 추모비도 고갯마루 길 옆에 세워졌다. 23일에는 이들을 위한 추모식과 제막식·음악회·주민 한마음 걷기대회 등이 열린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17일 전군에 보낸 지휘서신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우리 땅과 국민에게 가한 의도적이고 직접적인 선전포고와 다름없다”며 “확고한 태세와 준비된 능력만이 적으로부터 국민의 안녕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평도=정기환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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