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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 버렸지요 … 더 그리고 싶어서 지리산 그리고 싶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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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0일 해뜰녘의 지리산 중턱 시암재. 해발 850m 언덕에 서자 바람이 귀를 갈랐다. 서용선씨는 그 바람에 맞서서 그렸고, 바위 위에 웅크린 채 그림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그는 산이 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것은 유년 시절 ‘정릉 똘마니’라 불렸던 한 사내의 이야기다. 사내는 뒤늦게 그림을 그렸고,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됐다. 정년을 10년 남겨두고는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무직’이다. 2009년엔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에 선정됐다. 서용선(60)씨는 강렬한 원색과 과감한 필선(筆線)으로 역사와 인간의 관계에 주목해 온 화가다. 1951년 전쟁 통에 태어나 서울 정릉 일대에서 살면서 도시의 형성과 산업화를 경험했다. 그런 그가 최근 풍경에 눈을 돌렸다. 지리산을 무시로 오가며 현장 사생을 했다. 풍경화도, 현장 사생도, 손보다 머리가 앞서는 현대미술에서는 잊혀진 주제이고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지리산 스케치 여행길에 동행했다. 가는 길만 5시간. 여행길엔 어떻게 살아왔고, 왜 그리는지 하는 이야기가 곁들여졌다.

 #1. 정릉 똘마니

 서씨는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 직업란에 ‘자유업’이라고 썼다. 이렇다 할 직업이 없던 아버지가 굳이 공들이던 일은 꽃 가꾸기. 그러나 빈민가에서 원예가 다 무슨 소용인가. “우린 한 번도 문짝 있는 집에서 살아보지 못했어요. 돈이 딸리니, 집 지어 팔고 옮기고, 또 옮기고.”

 그는 서울 돈암동서 태어났다. 미아리 공동묘지 옆 천막집, 정릉 산동네 판자촌으로 옮겨 다녔다. 단칸방에 누나 셋, 여동생, 이렇게 일곱 식구가 지냈다. 밖으로 돌았다. 집밖은 사내들의 세계였다. 빈민촌엔 치안이 미치지 않았다. 지방에서 겨우겨우 유학 온 중고생, 생업에 바쁜 부모 밑에서 방치된 청소년. 시계도 빼앗고 노름도 하는 친구들 틈에서 방과 후 시간을 보냈다.

 공부는 진작에 놓았다. 대학에 번번이 떨어졌다. 재수하고, 삼수하고, 사수 대신에 군대를 갔다. 제대 후엔 중동 바람이 불었다. 중장비 기술을 배워 돈 벌러 갈 작정이었다. 학원을 알아보던 중 신문을 봤다. 이중섭과 박수근을 소개하는 박스 기사가 실렸다. 주먹이 제일인 이쪽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찬란한 세상이 거기 있었다. 기술 학원 대신 화실에 갔다. 6개월 뒤 서울대 미대에 합격했다.  

 #2. 두 세계

몽당이 된 오일 파스텔로 긋고 문지른 서용선의 스케치북.

 대학원에 들어간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사회 정화’라는 명목으로 정릉 친구들 태반이 잡혀 들어갔다. 그 중 한 명은 KAL기 납치 미수에 엮여 무기징역을 받았다. 비행기도 타보지 못한 녀석이 그런 엄청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조작이었다. 마침 학교에서는 조교를 하게 됐다. 점잖고, 편안하고, 우아한 교수들의 삶을 가까이서 봤다. 두 세계의 긴장 사이에서 균형 맞추는 게 힘들었다. 그러다 교수가 됐다. 봉급으로 부모 형제를 건사하고, 95년 양평에 작업실도 지었다. 그러나 “더 그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22년 만에 아버지를 닮은 ‘자유업자’가 됐다. 그때부터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무렵 TV를 보는데 지리산 산장지기의 은퇴를 그린 다큐 프로가 나왔어요. 배경의 산 개울이 그렇게 사람 같고 절절히 공감 가더군요. 나이가 들어서였을까요.”

 #3. 지리산

 그래서 지리산을 드나들었다. 한 번 내려가면 사흘씩, 일주일씩 있었다. 청학동, 성삼재, 오도재…. 계곡과 언덕을 다니며 종이에, 캔버스에 스케치했다. 많은 풍경화가들과 달리 사진은 찍지 않았다. “지리산의 한 부분에 제가 가서 막막하게 부딪치는 걸 그림에 옮겨야겠다. 땅의 온도가 내려가고, 열기를 내뿜고 하는 걸 내 몸과 함께 호흡해 봐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늘 인간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지리산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온전히 자연에만 몰두해지지도 않는다. 마고 할미가 지배하는 원시 토템의 지리산, 6·25 전후해 좌·우익이 대립했던 지리산, 공비들과 억울한 양민들의 지리산 등. “순수한 자연조차 우리가 순수하게 볼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런 걸 외면하고 산만 보겠어요. 산 밑자락을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든 개발해 어딜 봐도 인공적인 게 끼어 있어요.”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릴까? 결혼도 않고, 직장도 그만두고.

 "미술관에 남은 작품들을 보며 ‘나는 왜 저렇게 못하나’ 하는 실망감, 사회 문제와 내 삶의 문제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은데 왜 그걸 제대로 못하나 하는 분노, 두 세계 사이의 간극 속에서 내가 미술이라는 쪽에 더 가깝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그림은 그런 걸 담아낸 도구입니다.”

 두 세계 사이의 괴리만이 아니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간극, 동양의 산수화와 일본을 통해 이식된 서양 풍경화(landscape)와의 간극, 현대의 개념미술과 몸으로 직접 부딪쳐 사생하는 전통 간의 간극. 이 모든 것을 응축한 게 그의 산수화, 혹은 풍경화다.

구례=권근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용선의 지리산’전=30일까지 서울 팔판동 리씨갤러리(02-3210-0467)에서 볼 수 있다. 지리산을 오가며 현장 사생한 22점이 나왔다. 관람료 무료. 내년엔 대규모 산수풍경 전시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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