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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밤길 험한 꼴 당할라” 걱정에 입 닫는 FTA 전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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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임미진
경제부문 기자

“임 기자, 저기….” A 교수는 머뭇거렸다. “내가 설명은 충분히 해 줄 수 있어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와 관련해선 너무 답답한 오해가 많아요. 그런데 내 이름은 좀 빼주세요.” A 교수는 국제 투자협정 관련 전문가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논쟁으로 언론에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그런데 이젠 부담스럽다고 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오해가 안 풀려요. 유언비어는 점점 더 늘어나고…. 광우병 때랑 비슷해지는 거 같아 여론의 주목을 받기가 좀 그러네요.”

 조심스럽기는 B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통상 전문가인 그는 최근 서울시가 낸 ‘한·미 FTA 의견서’를 강하게 비판했다. “협정문과 관련한 사실 검토만 했더라도 그런 의견서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이름과 발언이 기사에 인용되는 것엔 민감했다. “ 한·미 FTA를 찬성하는 쪽으로 방송 토론에 응했더니 가족들이 걱정하더라고요. 밤길에 험한 꼴 당할라, 칼이라도 맞는 거 아니냐고….”

 이들의 걱정이 지나친 것일까.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이름을 넣어봤다. 제일 먼저 뜨는 연관 검색어는 ‘매국노’다. 그를 ‘미국 간첩’이라 부르거나 ‘매국노 XX’ 같이 욕설을 퍼붓는 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최근 본지 기고에서 “(모욕을 참다 못해) 통상교섭본부장의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통상교섭본부 고위 공무원은 “FTA 주무 공직자 다섯을 묶어 ‘을사오적’이라 부르는 단체도 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논쟁 대신 육두문자를 쏟아내는 네티즌은 극히 일부일 것이다. “맹장 수술 비용 900만원” 같은 유언비어를 실어 나르는 네티즌도 다수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소수의 이런 행동이 한·미 FTA에 대한 정상적인 토론을 어렵게 하고 있다. 지난달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선 나흘간 끝장토론이 열렸었다. 양측의 치열한 논쟁에 박수를 보냈던 건 기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통위는 지금 야당 당직자와 보좌진이 봉쇄했다. 전문가들은 네티즌 욕설이 두려워 입을 닫고 있다. 이번만은 몸싸움·날치기 대신 토론과 합의로 풀어가는 나라·사회를 기대했건만, 역시 너무 과한 것일까.

임미진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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