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코피, 유전병이 원인일 수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4면

건강한 위(왼쪽)와 유전성 출혈성 혈관확장증으로 출혈이 발생한 위의 모습.

최모(40·부산시)씨는 14, 12살 된 두 딸을 생각하면 하늘이 원망스럽다. 최씨가 할아버지·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성 혈관질환이 두 딸에게도 발견됐다. 최씨는 코피를 자주 쏟았던 가족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26세 때 발작으로 쓰러지고 난 후 유전성 혈관질환의 정체를 알았다. 최씨는 폐 동맥과 정맥에 기형이 발견돼 혈관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코피 출혈은 점차 심해졌다. 큰딸은 2년 전 최씨처럼 폐동정맥기형으로 수술을 받았다. 작은딸은 코피를 쏟는 날이 늘고 있다.

 출혈은 신체가 보내는 건강 이상 신호 중 하나다. 특히 이유 없이 자주 발생하는 코피를 무심코 넘겼다가는 대대로 고통을 받는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혈관에 문제가 생긴 ‘유전성 출혈성 혈관확장증(HHT)’일 수 있다.

 가천의대 길병원이 최근 HHT를 적극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가천 유전성 출혈성 혈관확장증 임상연구센터’를 열었다. 국내 첫 사례이며, 아시아에서도 중국과 일본에 이어 세 번째다. HHT센터는 길병원 함기백(소화기내과), 오석(생리학 및 기능유전체학, 미국 플로리다대)교수가 공동 센터장을 맡는다.

 HHT는 ALK1·ENG·SMAB4 같은 특정 유전자 이상으로 발생한다. 동맥과 정맥이 기형적으로 만들어져 출혈이 발생한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혈액은 동맥→모세혈관(가는 혈관)→정맥→심장으로 순환한다. 하지만 HHT 환자는 모세혈관이 없어서 혈액이 바로 동맥에서 정맥으로 흐르면 압력이 높아져서 출혈이 발생한다. 이를 동정맥기형이라고 한다. HHT 가족력이 있으면 자녀 중 절반 이상이 병을 물려받는다. HHT 환자는 인구 5000명 당 1명씩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함기백 공동센터장은 “현재 HHT 완치법은 없고 조기 발견해 증상이 악화하는 것을 막는 게 최선”이라며 “우선 코피를 자주 흘리는 가족력이 있으면 HHT를 의심하라”고 말했다.

 HHT를 일으키는 동정맥기형은 코·폐·뇌·간 ·위장 등 신체 여러 부위에서 발생한다. 이 중 출혈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코피다. 오석 공동센터장은 “동정맥기형이 뇌에 있으면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는 뇌졸중이 발생한다”며 “폐에서 발견되면 폐출혈은 물론 뇌경색(뇌 혈관이 막히는 것), 뇌농양(뇌에 고름이 차는 것)에도 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HHT를 방치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다.

 HHT의 증상인 코피는 청소년기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중년 이후 관찰되기도 한다. HHT의 조기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자각 증상이 없어도 폐나 뇌의 동정맥기형을 미리 발견하기 때문이다. HHT 여부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100% 알 수 있다. 가족력을 조사해도 90% 정도 잡아낸다.

 폐와 뇌에 발생한 동정맥기형은 혈관을 틀어막거나 제거해 치료한다. 코 같은 곳에 있는 미세한 동정맥기형은 새로운 혈관이 만들어지는 것을 억제하는 치료제를 투여한다. 콧구멍 안쪽을 막는 수술도 있다.

 함 센터장은 “길병원 HHT센터는 첨단 진단장비를 갖춘 소화기센터, 심장센터와 세계최고 수준의 영상진단기인 7.0T(테슬라) MRI(자기공명영상)로 미세한 동정맥기형을 발견할 수 있다”며 “환자의 신속한 진단과 치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호흡기내과·뇌과학연구소·이비인후과·방사선과·소화가내과·피부과·재활의학과가 진료팀을 구축했다”고 말했다.

황운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