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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미치도록 아픈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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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진홍
논설위원

# ‘금(金)’ 다는 저울은 정확하다. 금이 귀하기 때문이다. ‘비상(砒霜)’ 다는 저울은 더 정확하다. 사람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극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상 다는 저울보다 더 정확하고 엄밀해야 하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사람’ 다는 저울이다. 사람은 금보다 귀한 동시에 극약보다 무섭고 두렵기 때문이다.

 # 110년 전 미국인 의사 덩컨 맥두걸은 침대 크기의 초정밀 저울을 이용해 임종 전후의 사람 몸무게를 쟀다. 다름 아닌 ‘영혼의 무게’를 측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죽음과 더불어 영혼이 빠져나갈 것이라고 가정한 후 사람의 죽기 직전과 죽은 직후의 몸무게를 정밀하게 재면 그 차이가 곧 영혼의 무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실제로 미국 매사추세츠주 도체스터의 한 결핵요양원을 골라 그곳에서 임종을 맞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죽음 전후의 몸무게 변화를 측정했다. 이 희대의 측정결과 놀랍게도 임종 전후에 공통적으로 21g의 몸무게 편차가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그는 사람이 죽을 때 신체근육 이완으로 야기되는 대·소변 유출이나 땀의 증발 등과 같은 변수도 세심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이 실험결과를 1907년 정식으로 발표까지 했다. 영혼의 무게는 0.75온스, 즉 21g이라고!

 # 영화 ‘21그램’은 바로 맥두걸이 계산해 냈다고 주장한 영혼의 무게 21g을 그대로 제목으로 뽑은 경우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끝 대목에서 나오는 독백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21g이 줄어든다고 한다. 누구나 다! 21g은 얼마만큼일까? 얼마나 잃는 걸까? 언제 21g을 잃을까? … 21g. 5센트 5개의 무게. 벌새 한 마리의 무게 ….” 영혼이 고작 벌새 한 마리 무게인지는 정말이지 알 수 없다. 오히려 그 벌새의 깃털보다 더 가벼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아무리 정밀한 저울일지라도 영혼의 무게를 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은 그 영혼이 쉼 없이 상처받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영혼의 무게는 그 영혼을 지고 살아내야 하는 인간들의 고단한 삶이 마주하는 시련과 고통의 무게가 아닐는지!

 # 며칠 전 서울역 뒤편 서계동의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올려진 연극 ‘사랑이 온다’는 솔직히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만큼 이 연극은 그것을 보는 나를, 아니 적어도 그 극장 안의 영혼을 가진 모두를 건드렸으리라. 너무나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그보다 더한 폭력의 유전자를 대물림한 채 가슴 깊숙이 괴물을 품고 살아온 아들이 가출한 지 15년 만에 돌아와 펼쳐지는 극중 내용은 영혼이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것인지, 그리고 그 영혼이 실은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저장소에 다름 아님을 적나라하게 까발려준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가했던 것보다 더 큰 폭력을 자신의 여자에게 자해하듯 가함으로써 아버지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아들. 하지만 자해로는 아버지의 가위눌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아들이 택한 두 번째 여자는 모든 고통의 상처를 술로 떨칠 수 있다고 믿게 해준 열두 살 연상의 넉넉한 술집 여인. 그러나 위로만으로 영혼의 상처는 어루만져지지 않았다. 결국 아들은 돈이 궁해 장기매매의 덫에 걸려든 여자가 마취마저 풀려버린 상태에서 장기를 탈취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직접 목격한 후 자기보다 더 깊고 큰 상처를 지닌 그 여인을 끌어안으면서 비로소 자기 안의 상처 입은 영혼도 껴안을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상처는 더 큰 것 앞에 작은 것이 무릎 꿇는 법!

 # 이 시대의 아들과 딸인 이른바 2040세대의 분노는 자해와 위로만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보다 더 큰 고통과 상처를 입은 그 누군가, 아니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자식일 수도 있는 이들의 더 처절한 고통을 목도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상처가 아물게 될 운명인지 모른다. 아! 정말이지 미치도록 아픈 시대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