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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ISSUE] 이 옷들의 출발점, 한복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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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에스모드 서울의 ‘멋.짓다’ 전시 출품작.

“개량한복을 넘어서자”에서 출발한 아이디어가 한국적이고, 낯설지 않고, 그러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거듭났다. “우리 문화·역사·예술·전통이 깃든 현대 패션을 만들겠다”며 패션전문학교 에스모드 서울이 5개월여 공을 들인 결과다. 100여 개 작품 중 가 엄선한 ‘진짜 우리 스타일, 명품 패션’을 만나보자.

‘전통과 현대의 조화’는 전통 문화 계승 작업에서 늘 등장하는 구호다. 하지만 쉽지 않다. 현대인 혹은 현대 사회가 ‘세련미’ ‘아름다움’을 ‘서구적인 무엇’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패션에서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전통에 치우치면 뒤처지거나 어색해 보이고, 그렇다고 전통 요소가 약하면 이도 저도 아닌 ‘국적 불명 패션’이 돼 버려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패션에 ‘우리 것’을 깃들게 하려는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패션 전문학교 ‘에스모드 서울’이 수년째 이런 작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는 ‘한국 전통 문화 패션 작품 전시회’를 열고 패션에 우리 전통을 제대로 녹여낸 의상을 선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낯선 ‘개량 한복’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f가 엄선한 ‘한국적이고 낯설지 않은,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패션’을 소개한다.  

글=강승민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① 한복 바지 주름 살린 세련된 ‘점프 슈트’

김보미(21·사진 위)·임희원(21), 동갑내기 두 학생 디자이너가 만든 이 옷은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한 작품이다. “우리 문화의 세밀한 아름다움이 살아 숨쉬는 현대 의상”(한복 디자이너 이혜순씨), “아름다운 우리 문화가 학생들의 손끝을 거쳐 새로운 ‘우리 스타일’로 태어났다”(아름지기재단 신연균 이사장) 등의 호평을 받았다. 짙은 푸른 빛 조끼엔 동정을 달아 한복의 느낌을 세련된 장식 요소로 살려냈다. 하늘거리는 시폰(견으로 만든 얇고 비치는 천)으로 만든 소매에는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가 프린트됐다. 원작을 그대로 찍은 게 아니라 조형 요소를 더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따로 그림을 그려 넣어 합성한 것이다.

 현대화한 전통을 살리려 공 들인 작업은 이뿐 아니다. ‘점프 슈트’(상·하의가 한데 붙은 옷)의 세세한 주름은 밑단으로 모아질수록 남성 한복 바지의 주름과 같은 모양새다. 바짓가랑이를 매는 대님이 없지만 주름만큼은 한복의 그것과 똑같이 닮았다.

② 짚가마니 본뜬 ‘롱 베스트’

오간자(나일론·레이온 등을 섞은 화학섬유로 얇고 빳빳한 천)와 마를 성기게 짠 ‘가마니 천’으로 긴 조끼를 만들었다. 디자이너인 최주영(23)씨는 “파티복에 어울릴 것”이라고 소개했다. 최씨는 “전통 문화를 배우기 전엔 가마니를 응용해 옷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다”면서 “‘한국적인 선’에 ‘한국적인 전통’, 그중에서도 패션과 별 관계 없는 생활 요소를 버무렸는데도 현대 패션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스스로도 놀랐다”고 말했다. 세 겹의 오간자 중 가운데 천엔 산수화가 프린트됐다. 앞뒤로 포개진 오간자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산수화는 동양화의 은은한 매력을 한껏 더해 주는 효과를 낸다.

 의상엔 현대적인 요소도 눈에 띈다. 살짝 튀어나온 옆구리 선의 입체 재단이 그것이다. 건축학을 응용해 2차원 평면의 천을 3차원 입체로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현대 패션 기법이다.

③ 갑옷 입은 ‘부티’

‘부티’(복사뼈 위로 살짝 올라오는 길이의 부츠)가 갑옷을 입었다. 디자이너 최한결(24)씨는 가구 제작에 쓰는 황동 주물로 굽을 만들었다. 전통 갑옷에 쓰이는 쇠붙이의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서다. 구두 뒤축에는 황동 가구 장식 24조각을 일일이 이어 붙였다. 가구의 겉면 장식에 쓰이는 평평한 쇳조각을 뒤축에 맞게 일일이 손으로 구부려 각도를 맞췄다. 조각 조각 이어 붙인 것 역시 갑옷 분위기를 내려는 의도다. 구두 바닥도 예사롭지 않다. 볼트와 너트를 이어 붙여 고가구 느낌을 살렸다. 최씨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전통 소재를 무궁 무진하게 현대 패션에 활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④ 고구려 무사 닮은 여성용 가방

김재우(24)씨는 고구려 무사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구려 역사가 특히 흥미롭게 와 닿았다”는 김씨는 “무사의 웅장함을 현대 여성 패션으로 변화시켰다”고 설명했다.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구려 무사 전투복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인조 모피를 활용했다. 가방 옆면은 스터드(장식용으로 다는 작은 금속 단추)로 장식했는데, 이 장식 덕에 전투복 모양새와 일관성 있게 보인다.

⑤ 제대로 세련된 ‘한복 고쟁이 원피스’

“무심한 듯 세련된 멋, 제대로 우리 전통을 이해하고 현대 패션을 완성했다.” 의상을 본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씨의 평이다. 옷을 만든 이기석(20)씨는 “전체 실루엣을 고려해 디자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우 간결한 디자인의 서양식 여성 재킷과 시폰 천으로 된 바지, 재킷 위 ‘고쟁이 원피스’ 전체를 봐야 의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가 디자인에서 기본 요소로 삼은 것은 고쟁이다. 본래 한복을 입을 때 제일 안쪽에 입는 속속곳과 치마를 입기 전 입는 단속곳 사이에 받쳐 입는 속바지가 고쟁이다. 이씨는 펑퍼짐해 보이는 고쟁이를 본떠 원피스를 디자인했고, 이를 재킷 위에 무심한 듯 걸쳐 입게 했다. 허리엔 한복 저고리의 매듭을 닮은 자주색 벨트를 묶어 마무리했다.

⑥ 전통 문양 넣은 힙합 패션

이지수(23)씨가 만든 의상은 현대 패션과 우리 전통 문화의 닮은 점을 찾아 강조한 디자인이다. 바지를 예로 들면 풍성한 한복 바지 밑단을 조금 조여주면 요즘 유행하는 무릎 길이 트레이닝 바지와 닮은 모습이 되는 식이다. 이씨는 “통이 넉넉한 ‘배기 팬츠’와 한복이 닮았고, 상의 소매 부분도 펼쳐 보면 한복 소매 비슷한 모양으로 재단했다”고 설명했다. 한복을 닮은 소매는 자연스럽게 주름이 잡혀 넉넉해 보인다.

 안에 받쳐 입은 흰색 티셔츠엔 이씨가 직접 디자인한 프린트가 눈에 띈다. 전통 문양을 응용해 작업한 것으로 이 그림을 그리는 데만 꼬박 나흘이 걸렸다. 이씨는 “이번 워크숍을 하기 전엔 전혀 몰랐던 우리 문화의 세부적인 요소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면서 “배우기 전엔 스쳐 지나 모르고, 몰라서 응용 못했던 디테일이 내 패션에 영감을 줄 수 있게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⑦ 북청사자놀음, 인조 모피 조끼로

“우리 전통놀이에 ‘사자놀음’이 있는 것을 이번 작업을 하며 처음 알았다”는 김유억(27)씨는 “털실을 한 땀, 한 땀 엮어 인조 모피처럼 보이게 하는 데 일주일이 꼬박 걸렸다”고 했다. 그가 기획한 의도는 “한국적인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다.

 털실 사이 사이엔 금실을 넣어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한 매력을 발산토록 했고 조끼 아래엔 금색 지퍼로 줄을 매달았다. 평범한 조끼에 수공예로 특별한 요소를 더해 일상복이 아니라 간편한 파티복으로 응용할 수 있게 했다.

 융(면으로 보풀이 일게 만든 옷감) 소재 티셔츠엔 호랑이 얼굴을 그려 넣었다. 디지털 프린트를 한 것인데 프린트도 전통 그대로는 아니다. 김씨에 따르면 “민화 그대로는 조금 무서워 보여 약간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바꿔 디자인했다”는 것. 김씨는 “‘악의 기운’을 물리친다는 믿음이 있는 그림인데 그런 의미까지 이해하면 의상이 더 특별해 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패션 한류, 우리가 맡는다” 에스모드 서울의 실험

우리 전통 문화를 현대 패션에 응용하려는 시도는 계속돼 왔다. 한글 서예를 드레스에 활용한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이나 파리 컬렉션에서 ‘바람의 옷’이라는 별칭으로 인기를 얻은 디자이너 이영희가 그랬다. 전문가들의 실험은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으며 한국적인 패션이 서양 패션과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한편 ‘에스모드 서울’ 같은 교육기관에서의 실험도 진행 중이다. 이 학교 장혜림 교장은 “2007년부터 학생들에게 전통 복식 과목을 가르쳐 왔는데 올해부턴 의상뿐 아니라 우리 전통 문화 전반에 대한 교육을 강화했다”면서 “전통 옷만 이해하는 것으론 한계가 있고 역사를 비롯해 우리 문화 전반을 알아야 비로소 우리다운 패션이 완성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윤정 에스모드 서울 이사장은 “2009년 전주 한지를 이용해 ‘한지사(絲), 세계를 입다’는 전시를 했을 때 에스모드의 다른 나라 분교에서 한지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고 소개했다. 에스모드는 파리의 본교를 비롯해 전 세계 14개국 24개 학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대중음악에만 한류가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패션 한류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게 박 이사장의 바람이다.

 에스모드 서울 2학년 학생 100명이 참여한 한국 전통 문화 패션작품 전시회 ‘멋.짓다’ 프로젝트는 올해 5월 시작해 지난달 29일 마무리됐다. 서울대 중문과 허성도 교수의 특강 ‘우리 역사 바로 보기’를 시작으로 ‘한국 미술의 특징과 현대화’(‘월간 미술’ 이건순 편집장), ‘한글, 멋짓, 어울림’(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안상수 교수) 등의 강의가 이어졌다. 홍인수 에스모드 서울 교무처장은 “한국 복식뿐만 아니라 전통 건축과 미술·역사 등 문화 전반에 대한 전문가들의 강의가 전시회의 기초가 됐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특강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짚풀생활사박물관, 쇳대박물관, 한국자수박물관, 석주선박물관 등에서 자료 조사를 벌이고 직접 장인들에게 전통 공예 기법을 배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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