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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부시와 회담 때 괴상한 언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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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07년 9월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유엔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입에 안경 다리를 물고 있다. 라이스는 부시 대통령 재임 시절 외교의 뒷이야기를 지난 1일 발간한 회고록에서 공개했다. [중앙포토]

“새벽 5시 전화벨이 울렸다. 부시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뜸 ‘워싱턴 포스트를 봤느냐’고 물었다. 못 봤다고 하자 ‘나가서 집어 와라’고 하더니 ‘A20면을 보라’고 했다. 콜린(파월 국무장관)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우리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그대로 채택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부시는 격분했다. 나는 즉시 콜린에게 전화했고, 그는 발언을 철회하는 조치를 취했다….”

2001년 3월 7일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 간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아침을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절제된 언어로 이렇게 생생히 기록했다. 1일(현지시간) 미국 서점에서 발매된 회고록 『최고의 영예: 워싱턴 시절의 회고(No Higher Honor: A Memoir of My Years in Washington)』(작은 사진)에서다.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 이뤄진 당시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다루는 방법을 놓고 평행선을 달렸다. 라이스는 “부드러운 태도의 노정객(aging statesman)인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 체제를 바꿀 수 있다고 믿은 이상주의자였다”며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김정일과의 갈등을 피하려 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와 우리의 대북 정책을 둘러싼 서로 다른 접근법은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계속됐다”고 적었다.

 부시 전 대통령의 『결정의 순간들(Decision Point)』(2010년 11월),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의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들(Known and Unknown)』(2011년 2월), 딕 체니 전 부통령의 『나의 시대(In My Time)』(2011년 8월)에 이어 라이스 전 국무장관의 회고록으로 부시 행정부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의 기록이 모두 공개됐다.

회고록은 역사의 교훈서이자 반성문이 될 수 있다. 기록하는 문화의 강점이다. 라이스의 책은 8년의 부시 재임기간 중 국가안보보좌관을 거쳐 국무장관으로서 보고 겪은, 한반도 정책을 둘러싼 일화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음은 주요 대목.

 #노무현 대통령을 이해하긴 참 힘들었다. 그는 한국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내게 강의하듯 말하는 등 종종 반미적인 모습을 보였다. 2007년 9월 (호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그의 엉뚱한(erratic) 성격을 드러낸 사건이 있었다. 회담이 끝나갈 때쯤 노 대통령은 부시에게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기자들에게 밝혀 달라고 부탁했다. 그건 2005년 9·19 공동성명에 이미 들어 있어 새로울 게 없었다. 부시는 기자들에게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끼어들어 “한국전쟁 종전 선언을 언급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냐”라고 물었다. 부시는 깜짝 놀라 자신의 발언을 되풀이했다. 노 대통령은 좀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졸랐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했다. 통역자도 놀라 통역을 중단했다. 부시는 기자회견을 끝냈다. 노 대통령은 그게 얼마나 괴상한(bizarre) 상황이었는지 모르는 듯했다. 노 대통령의 예측하기 어려운 행동 때문에 솔직히 나는 한국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2003년 3월 파월 장관이 6자회담을 만들자고 제안하자 중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가 난 부시 대통령은 직접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에서 장 주석이 북한에 좀 더 유연하게 대하라는 말을 꺼내자 부시는 그의 말을 끊고는, 자신이 북한에 대한 군사 행동을 주장하는 강경파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했다. 한 술 더 떠 부시는 북한이 자제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핵 무장하는 걸 막을 수 없다고도 했다. 베이징은 그해 여름 6자회담 틀을 짜자는 데 동의했다.

 #2006년 7월 4일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을 포함한 7발의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뒤이어 북한이 핵 실험을 한 10월 9일 아침 후진타오(胡錦濤)는 직접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와 “(나도) 불과 한 시간 전에 북한으로부터 통보받았다”고 난처해 했다. 북한의 이런 행동은 중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부시는 “김정일이 음식을 바닥에 팽개친 셈”이라고 말했다…. 나는 중국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면 헨리(키신저 전 국무장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동북아의 큰 그림을 그리고 그랜드 디자인을 하는 위대한 전략가였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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