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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노래하다 테너 된 ‘옥스브리지’ 역사학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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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적인 성악가’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지난해 바로크 시대 음악으로 앨범을 냈다. 이달 한국에서
들려줄 작품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47)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스쿨 졸업생이다. 제러미 밴덤·존 로크 등 사상가를 배출한 이 학교는 ‘옥스브리지(옥스퍼드·케임브리지)’ 진학률에서 최고를 달리는 명문이다.

 보스트리지는 이 학교를 장학금 받으며 다녔다. 한 학년에서 가장 뛰어난 9명으로 뽑혔던 덕이다. “지금은 9명 중 대부분이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교수다. 그들은 내가 노래하는 사람이 됐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1일 서울에서 만난 보스트리지는 “하지만 친구들도 내가 ‘낭만적 아이’였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수학·물리학·역사 공부를 모두 좋아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을 이루는 여러 편의 시(詩)도 몇 번만 보면 외워진다 했다. 케임브리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옥스퍼드에서 마녀사냥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인 29세에 성악가로 데뷔했다. “사람들은 지성과 감성을 애써 구분하려 한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물론, 낭만주의의 첨병이었던 슈만에게도 학구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최근 슈베르트 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연구해 책을 내기도 했다. 슈베르트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자 중 하나다.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상실’이 깔려있어 나와 통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늘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해왔으며, 그 때문에 학자로 출발했어도 늘 음악을 갈망했다.”

 보스트리지는 10대 시절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겨울 나그네’ 음반을 틀어놓고 따라 부르며 노래를 공부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 그는 바리톤이고 내 음역은 테너기 때문이다.” 정식 레슨을 받거나, 악기를 배운 적도 없다. 소리를 혼자 듣고 만들어 불렀다. 때문에 나쁜 버릇도 생겼다.

 “턱을 지나치게 내밀고 부른다거나 소리에 무게를 너무 많이 싣는 등의 문제는 있었다. 하지만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은 오히려 행운이다. 테크닉에 신경 쓰지 않고 청중과 소통하는 데 중점을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트리지는 1990년 영국 한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돕다가 피셔 디스카우를 만났다. 피셔 디스카우는 “슈베르트 음악의 핵심에 도달했다”는 찬사와 함께 그를 세상에 소개했다. 보스트리지가 93년 런던에서 슈베르트로 데뷔한 배경이다. “피셔 디스카우는 독일 가곡의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줬다. 집중력·레가토(부드럽게 이어서 부르는 것)를 배웠다.”

 그의 노래엔 과장이 없다. 쓸데없는 힘이 빠져 간결하다. 네 번째인 이번 내한공연에서 선택한 것은 18세기 바로크 음악. “낭만 시대에 비해 저평가됐던 성악 작품을 재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명 바이올리니스트 파비오 비온디가 이끄는 악단 에우로파 갈란테와 함께 비발디·헨델 등을 들려준다. 4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6일 경기도 성남시 성남아트센터, 8일 대전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글=김호정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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