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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탈북자가 말한 “우리 할아버지 백남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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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백남운’이라는 이름 석 자. 10월 초, 일본을 경유해 한국에 들어온 한 탈북자의 입에서 뜻밖에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가 정말로 백남운의 손자라면 우리 현대사의 얄궂은 운명이 새삼 확인될 것이다. ‘할아버지는 월북, 손자는 탈북’이라는 기사 제목에서 드러나듯 그 비극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더구나 백남운은 해방공간에서 우리 민족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조선왕조실록>을 탈취하는 공작을 감행했다. 다행히 그 결과는 실패였다.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적상산본’ 실록을 북으로 실어가는 데 성공했다. <조선왕조실록> 수난의 전모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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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9일 출범한 북한 첫 내각. 앞줄 왼쪽 세 번째부터 홍명희 부수상, 김일성 수상, 박헌영 부수상이고, 가운뎃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교육상 백남운이다.

백남운(白南雲, 1895~1979). 우리 현대사에선 잊혀진 이름이다. 그 이름 석 자가 최근 다시 떠올라 관심의 초점이 됐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북한으로 빼내려 했다

10월 4일, 소형 목선을 타고 북한을 탈출했다 표류 끝에 일본 근해에서 구조된 탈북자 9명이 대한항공 KE788편으로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도착했다. 이제는 흔한 일이 됐건만 유독 이 사건이 주목을 받은 것은 그 탈북자 중 한 명이 백남운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손자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일본 당국의 조사 과정에서 나온 얘기다. 구체적인 내용과 진위는 향후 조사 과정에서 밝힐 것”이라고 짧게만 언급했다. 백남운은 당대 최고의 경제사학자로 1947년 월북 후 북한에서 교육상과 과학원 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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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아직 그 탈북자가 진짜 백남운의 손자인지는 미지수다. 다만 뜻밖에 백남운이라는 인물이 세간에 회자됐는데 정작 그가 해방 직후 <조선왕조실록>을 북한으로 빼돌리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된 장본인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 위기의 실록! 실패한 공작 전모
-경찰 11개월 수사 끝에 백남운 부인, 비서 등 체포
혼돈의 해방공간. 해방의 감격도 잠시, 좌우파의 이념 충돌 속에서 나라는 격랑에 휩쓸렸다. 그러던 중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터져나왔다.

<동아일보>는 1949년 11월 26일자에 ‘<이조실록> 절취범 백남운 비서 체포… 884권 고스란히 압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세간의 관심은 온통 <조선왕조실록>(공식 명칭)과 백남운이라는 인물에게 쏠렸다. 이념을 좇아 월북한 한 지식인과 국보가 엉킨 빅뉴스였다.

“작년 12월 하순 월북한 백남운의 지령으로 창경원 봉황각(장서각의 별칭)에 보관 중이던 <이조실록> 원본 도난 사건이 경찰의 수사 개시 11개월 만인 지난 24일 중부서에서 범인을 체포하는 동시에 도난당했던 책을 압수했다. 중부서 사찰계는 수일 전 확실한 단서를 얻고 24일 밤 시내 종로구 명륜동 2가 14의 5호에 거주하는 기세광(33)을 체포하고 엄중 문초한 바 훔친 사실을 자백하였다. 그런데 전기 기(奇)는 근로인민당원이며 백남운의 비서로서 백(白)이 월북하기 전에 기에게 <이조실록>을 훔친 후 상인으로 변장하여 배를 타고 월북하라고 지령했다는 것이라 한다.”(<동아일보> 1949년 11월 26일자)

같은 날 <조선일보>도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서울에서 장안파 결성을 주도했던 남파간첩 정백(鄭柏)의 체포를 알리는 기사 끝머리에 이렇게 썼다.

“중부서에서 24일 밤 시내 명륜동 2가 17번지의 5호 자택에서 기세광(33)을 체포하는 동시에 이자가 보관 중이던 <이조실록> 등 서적 884권을 압수하고 방금 엄중한 문초를 계속 중인바 전기 기는 북한 교육상 백남운의 개인비서로서 백의 령에 따라 지난번 상인으로 위장, O월 남하하여 <이조실록>을 북한으로 가져가려던 중 미연에 발각 체포된 것이다. 그런데 <이조실록>의 소유자는 확실치 않으나 앞서도 도난당해 말썽 많던 진단학회가 소유하고 있던 것의 일부인 것이라고 한다.”(<조선일보> 1949년 11월 26일자)

백남운 처 기남섭 서울시경 형사대에 잡혀
당시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창경궁 장서각의 실록 원본과 진단학회 소장 영인본이 각각 도난과 분실로 인구에 회자됐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백남운 주도로 북송하려던 실록을 진단학회본으로 추정했던 것이다. 당초 그것은 일본으로 유출됐을지 모른다는 의혹에 휩쓸려 있었다.

이날 이후 이어지는 기사를 마저 인용해보자.
“그동안 수사 중이던 백남운의 처 기남섭이 명륜동 2가 모처에서 서울시경 형사대에 의해 피검됐다고 하는데 그는 <이조실록> 절취 사건에 관계하여 앞서 입수한 동 서적 884권을 자기 집에 은닉한 일이 있으며 백남운과 모종의 비밀 연락을 취해왔다고 한다.”(<동아일보> 1949년 12월 5일자)

“작년 12월 하순 월북한 백남운 지령으로 창경원 봉황각에 보관 중이던 <이조실록> 884권을 훔쳐 월북하려던 백남운의 비서 기세광이 지난 11월 24일 중부서에 체포돼 엄중한 취조를 받아오던 중 그의 죄상이 명백히 되어 금 13일 서류와 함께 송청하게 됐다.”(<동아일보> 1949년 12월 13일자)

“국보 <이조실록>을 월북시키려던 기세광 등은 이미 보도한 것과 같이 지난 13일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었거니와 그동안 중부서에서 보관 중이던 <이조실록>을 비롯한 서적 884권은 대한학술원에서 정식으로 인수받게 되어 14일 중부서에서는 이를 인도해주었다 한다. 그런데 동 실록이 일반학계에서 국보라고 중요시되는 이유는 이조 500년 동안 대궐 내에서 일어난 정치·외교·치안 및 시정에서 일어난 가지가지의 대소 사건이 그때그때 기록된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확실히 이조 500년간의 사건이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학술원에로 보낸 것은 사본으로 원본은 두 벌 있는 것으로 보고 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난리를 피하기 위해 절간으로 갔을 것이나 지금 어디 있는지 확실하지 않고 다른 것 하나는 이왕궁에 보관돼 있지 않나 생각된다.”(<조선일보> 1949년 12월 16일자)

장서각 진본일까, 진단학회 영인본일까
실록 절취와 외부 유출 의혹은 비단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치안의 아노미 상황에서 국보급 유물을 빼돌리려는 수작이 난무했던 탓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신문은 대체로 연루자 검거 소식을 알리면서 필요한 사실만 나열하고 있기 때문에 전모를 파악하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세월이 한참 흐른 1957년, 탐사 전문잡지 <실화(實話)>가 7월호에 ‘국보 이조실록 865권을 훔쳐낸 백남운-구왕실에 없어진 국보를 찾기까지’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실었다. 필자 박민걸(朴民傑)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울 중부서 S형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글은 사실과 상당히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화>에서는 백남운과 기세광 사이에 백남운의 동생 백남교(白南敎)라는 인물이 새로 등장한다. 다음 대목을 보자.

백남운은 누구?

일제 강점기 경제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기고 해방 후 조선학술원 설립을 주도하던 백남운은 1946년 조선신민당의 경성특별위원회(나중의 남조선신민당) 위원장(북한은 김두봉이 위원장을 맡음) 등을 거쳐 1947년 근로인민당 부위원장으로 있다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1∼5기 대의원, 9월 교육상, 1952년 과학원 원장, 1956년 민주과학협회 위원장, 1961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1969년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거쳐 1974년 조국전선 의장을 지냈다. 1979년 사망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 서열 46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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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實話)> 1957년 7월호 ‘국보 이조실록 865권을 훔쳐낸 백남운-구왕실에 없어진 국보를 찾기까지’ 기사 본문.

“10월 10일이었다. S형사는 뜻하지도 않았던 북한 괴뢰 교육상 백남운의 동생인 백남교의 방문을 받았다. 면회를 왔던 길이라고 하면서 그는 기세광의 처를 동반하고 왔었다.

백남교는 일찍이 <조선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자였다. 그날은 별다른 화제는 없었으나 형사에게 아양을 떨며 호감을 사려는 꼴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수상쩍었다. 그가 돌아간 뒤 미심결에 그의 신원을 내사해본 S형사는 백남교가 현재 사상범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있는 몸임을 알아냈다. 백남운의 동생? 그리고 집행유예를 받고 있는 자? 그렇다면?

그가 자기를 찾아온 사실부터가 무슨 곡절이 있거나 꽁무니가 캥겨서가 아니었을까? S형사는 이렇게 그를 의심해보았다. 아무튼 이쪽에서 선수를 써서 백남교를 수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S형사는 수색영장을 받아 백남교의 가택 수색에 착수하였다.”
백남교는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 노선에 적극 가담해 김규식의 북행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인 지지성명에 나서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후 그 역시 월북해 김일성종합대 교수를 지내면서 1956년 김일성대 창립 10주년 기념 논문집에 ‘인쇄문화 발전사에 있어서 조선 인민의 창발성’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다시 <실화>의 한 대목.
“그러나 막 문밖으로 나섰을 찰나였다. 문득 눈에 뜨이는 무엇이 S형사의 발길을 잡아 멈추었다.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올랐든지 S형사는 집의 길이를 재어보기 시작하였다. 그다음에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방의 길이를 재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밖의 너비보다 방 안의 너비가 어쩌면 그렇게나 비좁아 보였던가. 그 까닭을 S형사는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놈의 벽이 수상했다. 어쩌면 벽의 폭이 이처럼 넓단 말인가? 벽돌로 굳이 쌓아올린 폭이 넓은 벽! S형사는 그중 벽돌 한 장을 뽑아놓았다. 그 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안을 더듬었다. 손끝에 무엇이 닿는다. 책인 것 같다. S형사는 형사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담벽을 허물어뜨렸다.

보라! 이런 속에 국보 <조선왕조실록>이 은닉되어 있었을 줄이야! 그 속에는 검은 포장지로 열 권씩 곱게 묶어서 쌓아둔 한문 석판(石版) 인쇄의 <조선왕조실록> 700권이 매장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실화>는 기세광·백남교의 고백 진술로 끝을 맺는다. 그 진상은 백남운이 8·15 해방 직후의 혼란을 틈타 수하를 시켜 당시 창경궁에 소장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 전권을 절취해 그중 700권은 자택에 은닉하고 나머지 100여 권은 가회동에 있는 친구 집에 감춰두었다는 것. 경찰은 나머지 100여 권도 무사히 회수하고 잔당을 일망타진하는 개가를 올렸다.

<실화>는 도난당한 실록이 창경궁 봉황각 보관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조선일보>가 1949년 11월 26일자에서 그것을 진단학회본으로 추정했던 것과는 배치되는데 현재로선 그 진위를 가릴 길이 묘연하다.

그리고 한 가지. 엄밀하게 말해 창경궁에 봉황각은 없다. 올바른 것은 장서각이다. 다만 장서각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일본 우지시(宇治市)의 봉황당(鳳凰堂)이라는 건물을 모방해 준공했는데, 소수 사람 사이에 봉황각으로 불렸다. 실록에 얽힌 이런 아픈 역사는 1992년 논란 끝에 장서각이 해체되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2. 해방공간 <조선왕조실록> 벼랑에 내몰리다
-장서각 보관본 도난·파실… 진단학회 영인본 일본 유출설까지
창경궁 장서각의 <조선왕조실록>은 관리 소홀로 벼랑 끝에 섰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 1948년 1월 8일자 <서울신문> 보도를 보자.
“우리나라 국보의 하나인 이조실록 원본이 도난 파실된 사실이 있어 식자층에 충격을 주고 있다.

구왕궁에서는 이 실록의 원본과 영인본을 창경궁 장서각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구랍 12월 30일 오전에 궁내를 순시하던 1계원에 의해 원본 대부분이 분실된 것이 발견되어 이에 일대 소동을 일으키는 한편 장서각은 조사해본 결과 850여 권 중 700여 권과 기타 구한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보 기타 각종 서류를 도난당한 것이 판명되었다.

31일에 소관 창덕궁경찰서에서는 범인을 수사하던 중, 범인 3명 중 2명을 체포하고 방금 준엄한 취조를 벌이고 있다 하는데 그들은 뒷담이 무너진 곳으로 여러 차례 걸쳐 집어갔다고 하며 실록의 국보적 가치에 탐이 나서 도취한 것이 아니라 이를 훔쳐다가 파지로 사용할 목적이었다 한다. 분실된 실록 대부분은 당국의 민첩한 활동으로 회수 또는 압수되었으나 일부는 이미 파지로서 사용되어 회복의 가망이 없을 모양이며 시내 모 제지회사에서도 일부를 압수하였다 한다.

이조실록은 원본이 4벌 있어 조일합방 전 강화·봉화·무주 등 4개서에서 보관 중, 합방 후 일제가 모두 서울로 가져다 일부는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이것은 동경진재(관동대지진)로 소실하고 남은 3부 중 2부를 서울대학교에 보관, 1부를 구왕궁에서 보관 중이던 국보인 것이다.

이 분실에 관하여 구왕궁장관 윤홍섭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 부끄러운 노릇입니다. 이와 같은 귀중한 보물을 무식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민족의 한 사람이 훔쳐가다니 외국 사람을 대할 낯이 붉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 찾아서 다행입니다.’”(<서울신문> 1948년 1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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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원. 사진의 맨 윗부분이 장서각(이왕직도서관)의 옛 모습이다.

1948년 1월 28일자 <경향신문>은 같은 사건을 뒤늦게 보도하면서 “실록을 휴지로 달아 판 무지한 절도단은 모두 12명으로 개중 전준택·이금래·김학봉·백년복 4인을 절도죄로 기소했다”고 썼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이듬해 <국도신문>의 이틀 연속 보도 역시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진본 이조실록 분실 등 국보 도난 사건이 일반의 기억에 새로운 지금 또다시 진단학회 소유의 영인본 이조실록이 행방을 감추어 학계에 물의를 빚고 있다.

이조실록은 비록 그것이 영인본이라고 할지라도 888권이라는 방대한 권수로 되어 있는 국보적 귀중도서로 국내에는 국립도서관·이왕직도서관·대학도서관 등에 있는 것을 합하여 불과 6, 7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애당초 25부밖에 안 찍은 이조실록 나머지 부수는 일본·중국·만주 등지에 각기 등록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이번 분실은 학계는 물론 국가적인 일대 손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휴지로 실록 내다 판 무지한 절도단 4인 기소
15년 전에 발족한 진단학회는 대동아전쟁 시 일제 탄압으로 부득이 문을 닫았다가 해방 후 다시 문을 연 다음 아키바·스에마츠 등 일본인 교수로부터 많은 귀중도서를 기부받는 한편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영인본 이조실록까지 구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 학회는 도서관 등의 설비가 불충분했던 관계로 학회 회원의 한 사람이요, 민족박물관장인 고 송석하 씨가 이를 민족박물관 도서실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작년 8월 송씨가 서거함에 따라 박물관 부관장이요, 인천에 있는 가납양조장 사장 겸 동국대학 교수인 김효경 씨가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진단학회 귀중도서를 보관하게 되었다. 이때 진단학회에서는 새로 취임한 이상백 위원장을 위시하여 이숭녕·유홍렬·조명기 씨 등 여러 위원이 동 실록의 보관을 학회에서 할 것을 결의하고 전기 김 부관장에게 실록의 반환을 요구하였던 것이다.“(<국도신문> 1949년 9월 26일자)

진단학회 소장 영인본 <조선왕조실록>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누군가 이를 일본으로 빼돌리려는 술책을 벌이고 있는데 일부 책은 이미 빠져나갔을 거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의심의 눈초리는 김효경 부관장에게 쏠렸다. 특히 당시 진단학회가 이 책을 구입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사동 태화정 주인 김복순 여사가 목청을 높였다.

“집을 한 채 사려 둔 돈이었는데 학회를 위하여 송석하 위원장이 꾸어달라기에 학자의 딸인 나로서 기꺼이 그 돈을 내놓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늘 이 책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나와 송씨의 미망인 김 여사를 무시하고, 그리고 박물관 직원의 눈을 피하여 동 실록을 실어갔다는 것은 대학교수로서 김효경 씨의 인격을 의심치 않을 수 없다.”(<국도신문> 1949년 9월 27일자)

신문은 이어 송 위원장의 미망인 김 여사가 “일본으로 가지 않았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그래야 돌아가신 분에게도 면목이 설 텐데 참으로 죄송하기 짝이 없다”고 한 말을 실었다. 그러나 이후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구체적인 후속 보도는 끊어졌다. 귀책사유 역시 가려지지 않고 역사에 묻혀버렸다.

3. 북한의 <조선왕조실록> 완역 쇼크
-김일성 특명으로 한국전쟁 때 북송된 ‘적상산본’이 원본
1990년 초 북한은 충격적인 사실을 대외 공개했다. 1975년부터 1991년까지 북한의 사회과학원과 민족고전연구소 주도로 <조선왕조실록>을 완역, 총 400책으로 펴냈다는 것이었다.

앞서 북한은 1960년대 초부터 실록을 정책편·관제편·법제편·군사편 등으로 분류한 다음 1970년부터 번역 준비에 필요한 작업을 끝냈다. 이 같은 준비와 실제 번역은 벽초 홍명희의 손자인 소설가 홍석중이 총괄 지휘했다. 이런 정황을 우리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결판이 날지는 몰라 당황했다.

사실 우리도 북한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번역 준비작업에 들어갔으며 1972년 민족문화추진회와 분담하는 방식으로 번역에 박차를 가했다. 이 실록 국역은 북한보다 3년가량 늦은 1994년 4월 마무리되었는데 개화기인 <고종실록><순종실록>을 포함시키는 등 북한과 차별화를 기했다.

북한의 <조선왕조실록> 번역 소식이 전해질 무렵, 한국에선 북한이 과연 어떤 판본을 소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판본이 어떻게 북한으로 넘어갔는지 궁금증을 강하게 드러냈다. 일부 학자는 북한이 <조선왕조실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고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해방 직후 북한의 김일성은 여러 경로로 민족의 재보 <조선왕조실록>을 확보해야 한다는 여망을 드러냈는데 실제로 해방공간에서는 북한의 실록 탈취 및 북송공작이 이어졌다. 그러나 모두 실패. 그렇다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2004년 북한의 인터넷 매체인 <우리민족끼리>가 그 궁금증에 해답을 주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북한이 <조선왕조실록>을 서울에서 빼내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1950년 7월 초.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울이 적의 치하에 들어가 있을 때였다.

“실록 구출 위해 동무들 서울로 파견한다”
당시 김일성은 교육부문 일꾼들을 갑자기 최고사령부로 불러
“<이조실록>을 구출하기 위해 동무들을 서울로 파견한다”는 임무를 하달했다. 전쟁과는 무관한 지시에 그들은 당황했다. 이에 김일성은 “전쟁으로 우리 민족이 이룩한 모든 귀중한 것들이 위험에 처했는데 민족의 재보를 우리가 아니면 누가 구원하겠는가”라고 훈시했다고 <우리민족끼리>는 밝혔다.

최고사령부의 작전지도에 ‘<이조실록> 구출 경로’가 그려졌고, 수송을 위해 전선을 오가던 군용차량이 배치됐다. 특히 유관기관과 군부대들에는 ‘최고사령관 명령’을 통해 지원작업이 하달됐다. 이 구출작전은 서울에서 가져온 실록을 “최고사령부 문서고에 안전하게 보관하라”고 김일성이 지시하면서 끝났다.

북한이 이때 서울에서 빼간 <조선왕조실록>은 구왕궁 장서각(창경궁 안 이왕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적상산본’으로,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실록은 당초 묘향산 사고본으로, 적상산으로 이관된 때가 1633년이니 417년 만에 다시 평양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역의 모체가 됐다.

허의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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