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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 생각 변화무쌍한 천재, 그들 머릿속엔 ‘마우스’가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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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호 25면

닮았지만 전혀 다른 천재와 괴짜
천재의 생각은 날아갔다 다시 돌아온다. ‘또라이’의 생각은 그냥 날아간다.
멍하니 있다고 아무 생각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생각은 날아다닌다. 멍하니 있다가 ‘아니 내가 지금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하며 그 생각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거꾸로 짚어 나갔던 경험은 다들 있을 것이다. ‘아,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왔구나!’하며 생각의 흐름을 찾아낸다. 보통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창의적 순간이다.

④마우스는 인간지능 확장 프로젝트의 산물

천재는 자주 그렇다.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마구 건너뛴다. 도무지 쫓아가기 어렵다. 넥슨의 김정주 사장이 그렇다. 한국에서 정보기술(IT) 분야의 3대 기업이라면 NHN, NC소프트, 넥슨을 꼽는다. 한 방에 훅 가는 IT업계에서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운이 좋았다. (난 성공의 대부분은 운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이야기하지만, 현존하는 ‘성공 내러티브’가 그뿐이기 때문이다. 낡은 산업사회의 이야기 방식이다. 세상에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은 정말 많다. 그러나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또 다른 방식의 성공 내러티브가 가능해야 선진국이 된다.)

김정주 사장도 운이 좋았다. 그 수많은 IT 창업자 가운데 그가 포브스 500대 부자가 되고, 한국의 10대 부호 안에 들 수 있었던 건 정말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만으로 그의 성공을 설명하면 심리학자로서 직무유기다. 김정주에게는 좀 특별한 게 있다.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자주 황당하다. 이야기가 막 건너뛴다. 한참 이야기하다 보면 시작이 뭐였는지 아예 까먹는 경우도 있다. 말끝을 얼버무리는 경우도 많아 제대로 알아듣기도 쉽지 않다. 그 날아다니는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게 김정주의 능력이다. 김정주의 아날로그적 삶 자체도 날아다닌다. 전화하면 어제는 서울, 오늘은 홍콩, 내일은 일본, 스페인, 남아공 등등이다. 사는 곳은 제주도다. 어린 딸들을 시골학교에 다니게 한다고 그곳에 산다. 그가 자기 회사에 들어가다가 수위에게 저지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날아다니는 생각’은 천재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또라이의 특징이기도 하다. 천재와 또라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천재는 날아간 생각을 잡아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날아다니는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라이’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의 생각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냥 막 간다. 그런데 신이 일부 천재들에게만 부여한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을 보통사람도 갖게 됐다. ‘마우스’다. ‘클릭’하면 생각은 바로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엄청난 혁명이다. 그런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의식과 행위는 도구에 의해 매개된다. 숟가락을 들면 ‘뜨게’ 되어 있다. 젓가락을 들면 ‘들게’ 되어 있다. 반대로 포크를 들면 ‘찌르게’ 되어 있고, 나이프를 들면 ‘자르게’ 되어 있다. 평생토록 하루에 세 번씩 ‘뜨고’ ‘드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의 의식과 ‘찌르고’ ‘자르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의 의식은 질적으로 다르다. 행위가 일어나는 물질적 맥락에 의해 의식이 매개되는 과정을 규명하려 했던 옛 소련의 레온티예프(Leontjew)식 ‘활동이론(Taetigkeitstheorie)’의 핵심이다.

‘활동이론’은 인간의식의 ‘외화(外化, Veraeusserung)’ 혹은 ‘대상화(Vergegenstaendlichung)’를 다룬 독일 관념철학의 전통에 서 있는 서구심리학의 대안으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을 주창한 교조적 이론이다. 그러나 문화적, 혹은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인간의식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는 사변적 ‘심리학주의’에 대한 활동이론의 비판은 정당하다. 인간 의식의 ‘외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상 세계의 ‘내면화(Verinnerlichung)’도 당연히 있다. 의식의 내면과 대상 세계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어떻게 체계화하는가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심리학과 여타 사회과학 사이의 긴장 영역이다.

20세기 말 ‘마우스’의 발명은 인간의식의 혁명적 전환을 가능케 한 사건이다. 수천 년 동안 인간 의식을 옥죄고 있던 텍스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저, 포크, 나이프가 인간 행위에 영향을 미치듯, 종이와 텍스트라는 의사전달 매체 역시 인간의 의식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다. 일단 종이 위에 써야 하는 텍스트의 공간적 범위는 기껏해야 A4용지의 크기를 벗어나기 힘들다. 또한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써나가야 하는 텍스트의 이차원적 한계는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서술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으면 텍스트로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연역법과 귀납법과 같은 논리적 사유에서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나올 수 없다. 사례에서 법칙으로(귀납), 혹은 법칙에서 사례로(연약) 반복되는 형식논리학적 사유는 그 본질에 있어 순환논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날아다니는 생각’을 대상화해 논리적 사유를 가능케 하지만 헤겔이 설파하듯 인간 의식의 대상화가 필연적으로 끌고 들어오는 ‘자기소외’ 현상을 피할 수 없다. 끝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창조적 인간사유가 좁디 좁은 사각형의 이차원적 공간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상하, 좌우의 직선적 흐름에 구속된 텍스트의 한계를 벗어나는 유일한 해결책이 대학의 논문이다. 논문에서는 ‘각주’ ‘미주’를 사용해 날아다니는 생각을 일부 잡아낼 수 있다. 국가공인의 지식편집 권력기관인 대학은 ‘논문’이라는 독특한 지식 공유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각주’ ‘미주’ ‘색인’ ‘참고문헌’ 등등의 방법론을 개발해 지금까지 그 권력을 유지해왔다(일반적으로는 지금 나처럼 괄호 안에 넣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각주’ ‘미주’와 같은 원시적 방법론으로는 디지털시대의 그 엄청난 지식폭발을 감당할 수 없다. 구태의연한 논문쓰기 방식으로 지식권력이 여전히 유지될 수 있으리란 착각이 도대체 어떻게 지금도 가능한 건지. 논문쓰기는 사라져야 한다!
텍스트의 한계는 ‘타자기’라는 매체 때문에 더욱 치명적이 된다. 손 글씨가 아닌 타자기로 규격화된 텍스트는 정보를 보다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한다. 대신 손으로 써진 텍스트가 포함하는 개별성은 포기한다. 필체가 전달하는 느낌이 사라진 것이다. 타자기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타이피스트’라는 직업이 세계 제2차대전 중에 각광받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전쟁에서 요구되는 의사소통이란 개인의 느낌과 생각을 가능한 한 배제한 것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원시적 타자기 자판에 의해 구조화된 텍스트의 한계가 컴퓨터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우스 특허 사들인 잡스의 혜안
컴퓨터 자판의 문제는 단순한 기능적 측면에서 봐도 한심하다. 숫자 바로 아랫단이 왼쪽으로부터 QWERTY로 시작되는 까닭에 쿼티자판이라고 불리는 컴퓨터 키보드는 자판 배열이 치명적이다. 1868년 크리스토퍼 숄스가 특허 낸 쿼티자판 배열은 오늘날의 컴퓨터 키보드에도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 그 특징은 많이 쓰는 자판일수록 멀리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자주 쓰는 자판의 키들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서로 엉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컴퓨터 키보드에서 키들이 엉키는 일은 절대 없다. 그런데도 타자기식 쿼티자판의 배열을 150년 가까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컴퓨터의 한글자판도 마찬가지다. 이어령 선생은 한글자판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가장 많이 쓰는 자판은 가장 자주 쓰는 손가락으로 쓰도록 하는 게 상식적이다. 한글 자·모음 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것 중 하나는 ‘ㅆ’이다. ‘했다’ ‘갔다’ ‘있다’. 거의 모든 한글 문장의 마지막에는 ‘ㅆ’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ㅆ’은 일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오른손 검지로 한 번에 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매번 시프트 키를 누르고, ‘ㅅ’ 자판을 쳐야 한다. 시프트 키는 또 어떤 손가락으로 누르는가? 새끼손가락이다. 평소에 새끼손가락 쓸 일이 있는가? 기껏해야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할 때다. 새끼손가락이 중요한 때가 딱 한번 있다. 과격한 시위에서 혈서 쓸 때다. 열 손가락 중에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그중 하나를 꼭 잘라야 한다면 다들 새끼손가락을 자른다. 그 새끼손가락으로 매번 시프트를 눌러야 하는 이 한글자판의 배열이 제대로 된 거냐는 거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사이버스페이스의 세계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컴퓨터 용량과 데이터 처리속도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그 컴퓨터와 인간이 만나는 ‘인터페이스’는 어찌 그리 원시적이냐는 게 이어령 선생의 통찰이다. (솔직히 난 매우 교만하다. 누굴 만나도 지적으로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만 만나면 바로 꼬리를 내린다. 뵐 때마다 느껴지는 지적 열등감에 자꾸 움츠러든다.) 150년이 넘도록 매일같이 반복된 인류의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컴퓨터 자판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발명품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마우스’.

사람들은 마우스가 스티브 잡스의 발명품인 줄 안다. 아니다. 조금 더 컴퓨터에 대해 안다는 이들은 스티브 잡스가 제록스사의 팰로앨토 연구센터의 발명품을 훔쳐왔다고 이야기한다. 아니다. 마우스는 1968년 스탠퍼드 연구센터의 연구원이었던 더글러스 엔젤바트(Douglas Engelbart)의 발명품이다. 당시 연구소의 ‘인간지능 확장’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마우스는 만들어졌다. 컴퓨터 화면에 ‘커서’를 그래픽으로 작동시켜 생각하는 대로 즉시 화면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한 것이다.

마우스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던 스탠퍼드 연구소는 마우스의 활용 분야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애플사에 고작 4만 달러에 마우스의 특허권을 넘겨 버린다. 잡스가 위대한 것은 그 엄청난 발명품의 진가를 알아본 능력 때문이다.

마우스를 이용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Graphical User Interface)’를 통해 이제 보통 사람들도 천재처럼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낼 수 있게 됐다. 자신의 관심을 클릭하면 바로 링크된다. 귀찮게 논문의 각주, 미주를 일일이 찾아 읽지 않아도 된다. 클릭하면 다 나온다. 글쓴이의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읽을 필요도 없다. 관심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 날아가면 된다. 주체적 책 읽기가 구조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은 텍스트로 구조화된 구시대의 환상일 뿐이다. 드디어 하이퍼텍스트의 시대, 즉 탈(脫)텍스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 마우스 덕분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와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cwkim@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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