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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정치판의 ‘악담 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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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정재숙
문화스포츠 에디터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에 매료된 나머지 이름을 에도가와 란포라 고쳤던 일본 추리소설가가 이런 말을 했나 보다. “천국에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영어일 것”이라고. 한없이 유연하게 휘감는 영어의 느낌은 어쩌면 그런 생각을 낳을 법도 하다. 서양인은 오히려 일본말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예가 많다고 한다. 받침 없이 모음자만으로 이어지는 일본어는 바로 그런 이유로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감각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한국말은 이방인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이따금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말에서 의미를 제거하고 음향 이미지로만 들어보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실험에 성공해본 적은 없다. 언어의 의미 차원은 워낙 압도적이어서 우리말을 생경한 외국어 듣듯 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한국말이 음향의 측면에서 아름다운지 어떤지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달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김황식 총리 앞에 그 나라 청소년들이 태극기와 한글 피켓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한국 사랑해요”를 외쳤고, 총리는 좋은 의미로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놀랍고 신통하다고 했다. 최근엔 한국말이 아름답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외국인도 늘고 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흔히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그도 모자라 ‘세계사에 희귀한’ 따위의 과장된 수식어까지 붙이는 예도 흔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들이 좋아했던 무슨 ‘순혈주의(純血主義)’에 영감이라도 받은 양 말이다. 이젠 피를 나눈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보다는 훨씬 더, 우리는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민족이라는 확신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외국인들이 구사하는 한국어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영원히 서투른 한국어다. 10년을 한국에서 지내도 그들의 한국어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에 동화되지 않은 외국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간혹 뻔히 한국어를 알면서도 일부러 영어로 말해서 한국 사람 기죽이는 일을 취미로 행하는 일부 백인이 이 범주에 속한다.

 둘째는 모든 종결어미를 ‘요’로 끝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체류기간이 짧아도 꽤 이르게 한국어를 습득한다. 생존과 관련된 문제니까. 워낙 속성으로 익힌 탓인지 모든 말은 단문이고 항상 ‘요’로 끝맺는다.

 나머지 셋째가 바로 한국 사람 같은 완벽한 한국어다. 이런 한국어로 옮아가는 비결 가운데 하나는 우리말 특유의 평탄한 억양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그 일이 그렇게 힘들 것 같지 않은데, 외국인들의 입에서 이런 한국어를 듣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진 않은 것 같다.

 이젠 러시아 미녀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소녀도 우리와 똑같은 한국말을 쓰는 것을 보게 된다. 이네들이 우리나라 국적을 지닌다면 당연히 우리 민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굳이 민족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역만리의 외국 청소년들이 말하는 우리말 몇 마디는 국위 선양이니 국격(國格) 상승이니를 떠나서 어떤 인간적인 가슴 뭉클한 감흥을 낳는다.

 우리말에는 좋지만은 않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일본말도 마찬가지지만 길고 긴 말의 끄트머리에 가서야 긍정인지 부정인지 드러난다. 자칫 기분 나쁜 얘기로 ‘기회주의적’인 언어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못지않게 큰 특징이 ‘주어’가 탈락된다는 점이다. 우리말은 주어를 착실히 붙이면 아주 어색해진다. 명심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일정한 문맥 속에 표현된 말의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박지원·이동관 두 사람이 벌이는 ‘악담 문자’와 관련한 공격과 해명을 보노라면 정치인들은 일상 언어의 취약한 부분을 활용하는 데도 역시 능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말을 곱게 가꾸기가 쉽지 않다.

정재숙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