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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빨간 마후라, 육군 김일병  전쟁 악몽 벗어난 60년대 ‘군인 가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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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호 10면

어제가 국군의 날이었다. 어느 틈엔가 우리 사회에서 군인은 매우 예민하고도 희한한 존재가 됐다. 배우 현빈의 해병대 지원 소식이 모든 뉴스를 뒤덮고, 고위 공직자와 그 아들의 병역 문제가 늘 청문회 자리에서 문제가 되며, 정치인 문재인이 특전사 시절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는 사회. 군복무 이야기만 나오면 남자들이 모두 평상심을 잃어버리고 희한하게 흥분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군인이 되는 일이 의무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부심과 피해의식이 모두 적지 않은 것이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9> 비장한 국군에서 명랑한 국군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남자아이의 꿈이 ‘군인’이고 골목마다 병정놀이 하는 아이들 소리로 시끄럽던 때가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군인도 아니면서 군대식 거수경례를 배우고, 교복 차림이라면 어른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채 50년도 안 된 일들이다.

아니, 지금부터 50년도 안 된 일이라고 계산을 하는 것은 다소 불합리하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0년도 안 된 때이니, 군인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대중가요 속 군인의 모습은 일제 말 친일가요에서 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해 해방 이후에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노래로 이어진다. 현실 속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배경이니, 노래 속 군인의 모습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전우야 잘 자라’)에서처럼 비장했다.

“가랑잎이 휘날리던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꿈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아 아아아아아 그 목소리 그리워.”(신세영의 ‘전선야곡’, 1952,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이런 진지하고 비장한 군인의 모습은 ‘삼팔선의 봄’ 등 1950년대 후반까지 어느 정도 유지됐으나 채 10년을 유지하지 못했다. 60년대에 들어서면 이렇게 경쾌한 분위기로 군인의 이미지가 바뀐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봉봉사중창단의 ‘빨간 마후라’, 1964,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

문화방송 라디오의 62년 드라마를 64년 신상옥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로 드라마, 영화, 주제가 모두 히트했다. 영화 내용은 6·25전쟁을 시대 배경으로 마지막에 주인공이 마치 가미카제처럼(작가 한운사가 그렇게 말했다) 비행기와 함께 몸을 던져 다리를 폭파하는 비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공군 제트기 조종사들의 이야기이니 흙과 함께 뒹구는 육군 이야기와 달리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가 있고, 정부 지원 아래 많은 공중촬영 장면을 담은 컬러영화여서 더욱 세련됨을 뽐내는 작품이었다. 노래 역시 비장한 슬픔이 아닌, 경쾌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선택해 크게 히트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넘어가자 이제 군인에게 점점 전쟁 이미지는 탈각되었다. 어차피 대중가요의 팬은 젊은이들인데, 군인 노래가 계속 비장하기만 한 것을 60년대 젊은이들이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군대에서 부르는 공식적 군가로는 다소 경직되게 군기 팍팍 들어간 노래가 교육되었겠지만, 일반 대중들의 호응으로 유지되는 대중가요까지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병 훈련 육 개월에 작대기 두 개/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김일병(헤이 부라보 김일병)/ 기상나팔에는 투덜대지만 (헤이 부라보 김일병)/ 식사시간에는 용감한 병사/ 신나는 휴가 때면은 서울의 거리는 내 차지/ 나는야 졸병이지만 그녀는 멋쟁이/ 백발백중 사수에다 인기도 좋아(헤이 부라보 핸섬 보이)/ 육군 김일병님 용감한 병사.”(봉봉사중창단의 ‘육군 김일병’, 1966, 정민섭 작사·작곡)

이 노래 속 군인에는 전쟁의 고통이나 아픔은 흔적조차 없다. 기상나팔, 식사시간, 사격훈련, 휴가 등이 그들 삶의 풍경이다. 명랑하고 발랄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던 전쟁 때의 군인과 비교하면 거의 ‘당나라 군대’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그러나 60년대 노래 속의 군인은 여전히 멋지고 씩씩하다. 대중가요 속에서 ‘찌질하거나’ 우울한 군인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대통령과 고위 공직을 모두 군인 출신이 장악했던 시절, 누가 감히 군인을 그렇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한국 록의 아버지’인 신중현의 노래에까지 군인은 멋진 존재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 동네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믿음직한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김추자<사진>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1969, 신중현 작사·작곡)

말썽 많던 남자들도 군대를 갔다 오면 멋지고 의젓해진단다. 게다가 월남에서 영어도 배우고 미제 물건도 갖고 왔으니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미국의 로커들이 월남전 반대운동을 하고 있을 때 한국 록의 아버지는 월남전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고 대중들의 호응으로 인기를 얻은 것을 생각하면, 미국과 한국의 록의 지닌 역사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새삼 절실하게 느낀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 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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