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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신부' 극작·연출-황지우·김광림

중앙일보

입력

황지우가 툭 던지듯 내뱉었다. "저질러 버렸다. 자격도 안되는 놈이 범죄를 저지르듯 했다."

김광림이 받는다. "늘 마음 속의 짐으로 남아있었다. 빚진 것 비슷하게 나를 옥죄었다."

18일부터 27일까지 예술의전당 야외극장 특설무대에서 공연하는 '5월의 신부'(02-762-0010)를 두고 나눈 대화다.

황지우와 김광림. 올해 마흔 여덟의 동갑내기다. 직장도 같다. 황씨는 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김씨는 연극원장으로 있다. 그들이 의기투합했다.

황씨가 희곡을 쓰고 김씨는 연출을 맡았다.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광주 민주항쟁을 돌아보는 작품이다.

외모는 상반된다.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유명한 황의 본업은 시인. 퉁퉁한 체구에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연상케 한다. 조각가·사진가 등 탈(脫) 장르적 활동을 해온 그가 처음으로 희곡을 썼다.

김씨는 극작가·연출가로 30여년 동안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었다. '북어 대가리', '나는 고백한다' 등을 통해 한국 연극의 문법을 바꾼 전위적 연극인으로 통한다. 다소 마른 몸매에서 이지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부부에 비유하면 황씨는 자상한 어머니를, 김씨는 냉엄한 아버지를 닮았다.

연습장에서도 황씨가 바리바리 음식을 싸와 배우들을 다독거리는 반면 김은 예리한 시선으로 배우들의 장·단점을 콕콕 집어낸다.

선뜻 어울릴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그들이 손을 잡은 까닭은 무엇일까. 둘 다 "가슴 속에서 터져나오는 열정 하나로 뭉쳤다"고 답한다.

"광주의 비극이 일어난 지 20년이 되는 지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5월의 신부'는 그날 비극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비애에 무게를 실은 작품. 1980년 5월 15일부터 27일까지 광주의 움직임을 재구성하되 지금 여기 살아있는 사람의 고통에도 초점을 맞춘다.

황씨 특유의 시적 이미지가 풍부하게 살아 있어 희곡만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난 3월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봄날'(임철우 원작·김아라 연출)이 20년 전 광주의 상황을 다큐멘터리적으로 재현했다면 '5월의…'는 그날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의 갈등과 혼동, 그리고 아직껏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극명하게 일러준다.

하지만 무대화는 전적으로 연출가의 몫. 게다가 야외극이라는 점에서 부담이 크다. 비교적 시설이 잘 갖춰진 실내극보다 연기·무대·조명 등이 더욱 완벽하게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김씨가 자신있게 말한다. "미술 윤정섭·조명 이상봉·동작 김삼진·발성 서상권 등 각계 권위자가 대거 참여했다. 배우도 경쟁률 10대1의 오디션을 통해 뽑았다. 계엄군의 집단발포 장면에선 조명탄 흰색 빛으로 밤하늘을 밝히고, 마지막 결혼식 장면(시민군 대변인 김현식과 선전부장 오민정이 사망하기 바로 직전 전남 도청에서 사랑을 확인한다)에선 무대 전체를 꽃잎으로 덮을 것이다."

옆에 있는 황씨가 계속해서 "해피!(행복해)"를 연발한다.

"저 사람이 몸은 게으른데 머리는 좋아요. 제 뜻을 저보다 더 깊이 파악합니다. 극작가로서 이만한 축복도 없지요." 김씨 얼굴에 지긋한 웃음이 번진다.

일견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지금 바짝 긴장된 상태. 처음엔 뮤지컬로 기획했으나 제작비가 부족해 연극으로 바꾸고, 또 각종 공연이 몰린 5월이라 실내극장을 잡지 못해 야외극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씨가 "처음엔 연극원 마당에서라도 공연하려고 했다. 제사를 지내는 심정으로 맹렬하게 연습했다"고 운을 떼자 황씨가 "실내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반드시 작품 내용으로 '복수'하겠다"고 전의를 다진다.

작품 얘기로 돌아갔다. 2000년의 광주가 주는 의미를 물었다. 일부에선 가슴 아픈 얘기를 꼭 꺼내야만 하느냐는 의문도 제기한다고 덧붙였다.

"광주의 역사적 진실은 많이 밝혀졌습니다. 반면 예술적 형상화는 빈약합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바스크 지역이 왜 유명해졌습니까. 피카소가 명작 '게르니카'를 남겼기 때문 아닙니까. 비단 광주뿐 아니라 우리 시대 예술가들은 시루떡 같이 켜켜이 쌓인 우리 현대사의 구석구석을 적극 표현해야 합니다."(황지우)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입니다. 일단 예술에 대한 검열이 사라졌잖아요. 그 출발점이 된 게 광주입니다. 광주를 통과했기에 지금 우리가 아무런 공포 없이 글을 쓰고 얘기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광주의 그 큰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당시의 아픔을 씻어내는 씻김굿으로 보면 됩니다." (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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