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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검색에서 사색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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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지난 주말 언론계 대선배의 부르심을 받았다. “책을 좀 줄 테니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댁으로 달려가 보니 쇼핑백 몇 개로 해결될 분량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사 모으신 일본 책들이 큰 책장 두 개에 꽉 차 있었다. 대선배는 1만5000권을 헤아리는 소문난 장서가이자 독서광이다. 책 일부를 처분하려는데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뭣해 적당한 후배로 나를 점찍으신 것이었다. 영광. 당장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용달차를 계약했다. 일요일 아침 다시 선배 댁을 찾을 때는 가슴이 설렜다. 우리 집 거실과 서재는 이미 다른 책들에 점령당한 상태라 군 복무 중인 아들의 방 한쪽 벽을 비웠다. 책장 두 개가 맞춤하게 들어차자 뿌듯함이 밀려왔다.

 국내에서 한 달 평균 10만원, 즉 1년에 120만원어치 이상의 책을 사는 ‘120만원 클럽’에 드는 사람은 11만8730명이라고 한다. 대형 서점 네 곳을 통해 집계한 결과다. 평균 나이는 생각보다는 젊은 38.5세.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다. 나는 120만원 클럽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아래 단계 정도는 될 것이다. 책에 대한 추억도 나름대로 갖고 있다. 내가 다니던 공립 초등학교에는 도서실(도서관이 아니라)이 있었지만 막상 책은 몇 권 없었다. 반면 어머니가 청소 일을 하시던 사립 초등학교에는 교실마다 학급문고가 있었다. 방과 후 어머니도 뵐 겸 그 학교에 찾아가 책을 읽다가 몇 권은 집으로 ‘무단 대출’해 오곤 했다. 2년 남짓한 기간에 모든 교실의 책을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120만원 클럽에 속하는 11만8730명은 조선 실학자 이덕무의 표현을 빌리자면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라고 불러도 좋을, 프로 독서꾼들이다. 일류 독서가 중 한 명인 표정훈은 스스로를 ‘탐서(耽書)주의자’로 칭한다. ‘책의 소유를 삶의 유일지상의 목적으로 삼고, 책 내용보다는 책 자체를 중시하며, 책을 진(眞)과 선(善) 위에 두는 사람’이다. 그래서 딱 두 번 책을 훔친 기억이라든가, 지금까지 남에게서 책 7권을 빌려 갖고 있고, 빌려준 것은 9명에게 21권이라는 엄청나게 중대한(!) 사실까지 진지하게 털어놓는다(표정훈, 『탐서주의자의 책』). 베스트셀러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저자 이지성도 만만치 않은 고수다. 그는 “논술시험을 위한 인문고전 독서는 하지 마라”고 충고한다. 통독·정독·필사(筆寫) 등의 단계를 거치되 반드시 “통(通)할 때까지 사색하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두 독서가의 배경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표정훈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서가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혼날까 두려워하며 서가에서 빼낸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로 그해 겨울방학을 지새웠다고 한다. 부친이 대단한 책 수집가였던 이지성도 공간이 부족해 아들 방에 책을 놓아둔 아버지 덕분에 인문고전들과 친숙해졌다.

 ‘검색에서 사색으로’. 9월 독서의 달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가 내건 슬로건이다. 슬로건이 참 좋다 싶어 문화부 도서관정책과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며칠 전 퇴임한 정병국 전 장관이 즐겨 쓰던 표현이라 했다. 검색과 사색은 정말 다르다. 인터넷 시대에 검색에만 몰두하다 과부하 탓에 구조 자체가 바뀌는 우리의 뇌를 걱정하는 소리도 높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문서와 전통적인 종이 문서로 각각 나누어 피실험자들이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지 알아보았더니 종이 문서 쪽이 월등한 성적을 보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터넷이 주는 자극의 불협화음은 의식적·무의식적 사고 모두에 합선을 일으켜 깊고 창의적인 사고를 방해한다’는 것이다(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물론 검색 안 할 도리 없고 인터넷을 끊을 이유도 없다. 사색과 병행하자는 얘기다. 새 것은 새 것대로, 오래된 것은 오래된 대로 기분 좋게 풍기는 종이책 특유의 내음을 즐기기에 딱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