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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내부고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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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로마 시대 창보병이 무적이었던 건 엄혹한 ‘진군 규칙’의 영향이 크다. 창보병은 방패를 앞세우고 진격하다가 한 발이라도 물러서는 병사가 있으면 곁의 병사가 찔러 죽이게 했다. 이 규칙을 어기면 그 옆의 다른 병사가 의무를 소홀히 한 동료까지 죽이도록 했다. 병사에게 후퇴는 곧 위법이라고 보고 조직 구성원이 직접 죄를 물어 처벌케 한 것이다. 이 진군 규칙이 내부고발의 기원이라는 얘기가 있는 까닭이다.

 내부고발은 공익을 위해 조직의 위법·비리를 외부에 알리는 ‘공익 호루라기’다. 내부고발자가 영어로 ‘휘슬블로어(whistleblower)’ 아닌가. 그러나 내부고발자는 ‘정의 실천자’라기보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내부고발자의 시련과 고통을 그린 영화들만 봐도 그렇다.

 러셀 크로가 주연한 영화 ‘인사이더(insider)’는 미국 담배회사 브라운 앤 윌리엄슨의 간부 제프리 위건드 박사가 회사 측이 중독성 높은 유해 물질을 담배에 넣은 사실을 폭로한 뒤 겪는 신변의 위협과 고뇌를 담았다. 영화 ‘실쿠우드’에서 오클라호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오염 위험을 폭로하는 내부고발자로 그려진 실존 인물 캐런 실쿠우드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한국 사회라고 다르지 않다. 내부고발자는 달갑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고 핍박받기 일쑤다. 내부고발의 상징적 인물인 이문옥 전 감사관 사례가 대표적이다. 1990년 감사원이 대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취득에 대한 과세 실태 감사를 벌이다 로비 등의 이유로 감사를 중단한 사실을 폭로한 그에게 돌아온 건 구속과 파면이었다. 내부고발자 9명의 심리·스트레스를 분석해 2006년 출간된 『불감사회』를 보면 실태가 더 적나라하다. 5명이 직장에서 쫓겨났고 7명은 자살 유혹을 느낄 정도로 정신적·육체적 충격을 겪었다. 한 명은 실제로 자살했다.

 고용노동부가 내부고발자의 신분을 보호하는 ‘부패행위 내부 신고자 보호 등에 관한 규정’을 장관 훈령으로 만들어 이달부터 시행한다. 정부 중앙부처 중 처음이라고 한다. 누가 내부고발했는지 발설하는 사람을 징계하고, 내부고발자가 신분상 불이익을 받았을 경우 원상회복시키며 필요할 경우 전직을 통해 신분 보장을 하는 등의 내용이다. 민간기업이든 공직사회든 내부고발 제도가 실효를 거두려면 내부고발자 보호가 선행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내부고발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러 가는 쥐 신세여서는 내부고발 활성화는 요원하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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