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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음식잡설 ⑭ 그 많던 실비집은 다 어디에 갔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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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어려서 술을 배운다는 건 아버지 흉내였다. 모양은 흉내 낼 수 있었지만, 그 정신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 쓴 소주가 ‘달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고, 얼큰하고 뜨거운 찌개 안주가 ‘시원하다’는 것도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술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버지 자리에 들어선 선배들은 나를 골목의 실비집으로 이끌었다. 그랬다. 여름이면 소나기가 양철 처마에 후드득 듣는 소리가 안주였고 신 김치 한쪽만 있어도 ‘탁배기’가 두어 잔 넘어갔다. 값싸게 차린 백반 상에 소주 두어 병쯤 마셔도 크게 흠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계란프라이 달랑 하나를 안주라고 시켜서 술을 마셔도 되던 때이긴 했다. 그렇게 술집엔 정이 있었고, 사람 사이에 벽도 없었다. 그런 술집 간판에는 예외 없이 ‘비공식 업종’ 표시가 있었으니, 바로 ‘실비집’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내가 아버지 나이만큼 되고 나니, 술집의 풍류는 야박해지고 골목은 새침해졌다. 매콤하게 무친 콩나물과 된장에 박은 매운 고추 같은 손맛 살아 있는 안주들도 함께 기억의 저편으로 저물어버렸다. 돈이 궁할 때 된장찌개에 찬밥 말아 서너 명이 끼니 삼아 안주하던 푸근한 그림도 구경할 수 없다. 눈대중을 야박하게 할라치면 손으로 눈금을 대보며 옥신각신하던 ‘소주 반 병’의 추억은 또 어떻고. 비록 요새도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가 복고풍으로 등장하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억을 매개로 한 상술일 뿐 우리가 찾던 꿈결 같은 소중한 기억은 아닌 바에야.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 실비집 같은 소소한 선술집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자리에 고깃집이 들어선다. 푸짐하고 입맛 당기기는 하다만, 주인의 개성은 뒷전이 된다. 그냥 썰어내는 고기와 공장 된장이 주인공이다. 손맛 있는 주인으로서는 오히려 아쉬워할 대목이다. 너나없이 비슷한 구색이니까 솜씨 발휘가 어렵고, 내색을 해봐도 기억에 안 남는다. 당신은 안 그런가. 삼겹살 잘하는 집, 이런 질문을 받으면 머뭇거리게 마련 아닌가.

실비집이 사라지면서 주인과 손님 사이의 지워지지 않을 추억도 쌓기 어렵다. 가게는 더 많은 이윤에 목을 매고, 손님은 주인이 누구인지 알 바 없이 비슷비슷한 고기를 씹는다. ‘객단가’며 ‘테이블 회전’ 같은 전문가나 쓸 법한 용어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다.

내가 일하는 식당 뒷골목에는 맛있는 반찬을 내던 역사 있는 밥집이 있었다. 주인의 손맛이 있어서 반찬에 간이 잘 배어 있었고, 마룻바닥은 정갈했다. 나는 거기서 밥을 먹을 때마다 불안했다. 이렇게 값싸고 푸짐한 반찬을 결들인 싼 밥을 팔면서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손 많이 가서 사람 많이 써야 하는 밥집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나의 불안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어느 날 커다란 고깃집 간판이 거기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 자영업 비율은 OECD 평균의 몇 배라는 기사가 나온다. 기업에서 사람을 흡수하지 못하니 자영업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그나마 손쉬워 보이는 식당 쪽에 창업 러시를 이룬다. 수요가 많다 보니 ‘바닥 권리금’이라는 역사에 없던 해괴한 말도 생겼다. 비싼 임대료에 권리금을 감당하려면 값싼 백반과 가정식 안주로는 매출을 달성 못한다. 밥집이 모두 고깃집으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된 저간의 사정이 이런 것이다. “데친 두부 몇 쪽에 무슨 돈을 받느냐”고 화를 내시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실비집이니 목로주점이니 조촐한 안줏거리를 마련해서 잔술을 파는 집은 포장마차라도 이문을 못 맞춘다.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처럼 절인 마늘 몇 쪽에도 돈을 받으면 모를까, 공짜 안주를 푸짐하게 주던 우리 술집 정서는 이제 종말을 고한 것 같다.

막걸리가 아직 붐이 일기 전이던 몇 해 전, 한 한국인 프리랜서에 의해 전국의 막걸리 집이 일본에 소개된 적이 있다. 일본인이 그 책을 들고 성지처럼 막걸리 순례에 나섰다. 정작 그들이 놀라워했던 건 막걸리 맛보다는 오히려 장터 실비집의 수수하고 소박한 분위기였다. 김치와 볶음 따위의 푸짐한 공짜 안주와 부뚜막에서 대충 지져내는 값싸되, 푸짐하고 인정 어린 음식이었다. 야박한 일본 술집 문화와 사뭇 다른 이런 정서는 사실 지구상에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술집 문화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런 노포(老鋪)들이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켜줄지 알 수 없고, 쓸쓸한 탄식만 남게 된다.

“그 많던 실비집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chanilpa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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