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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대궐 이룬 봄산을 오르며...

중앙일보

입력

산으로 접어드는 어귀마다 꽃 잔치가 복작복작하다.

도심에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며 차례를 따지던 개나리.목련.벚꽃이 산기슭에선 너나들이하듯 동시에 어울려 흐드러진다.

산벚나무가 하얗게 폭죽을 터뜨리고, 목련이 목젖 떨어지게 웃어 젖히는데, 동네 뒤 숲정이에 쪼글쪼글한 개나리 꽃술들은 봄바람이 간지러워 나불거린다.

무리무리 핀 꽃들의 하양.노랑.보라색과 싱그러운 나뭇잎들의 담녹.연녹.진녹색이 바람 따라 뒤섞이니 그대로 거대한 파스텔화 한 폭이다.

서울 우이동행 8번 버스 종점에서 손병희선생 묘소 쪽으로 샛길을 걷다 꽃 대궐을 벗어나 왼쪽으로 오르면 진달래 능선이다.

초입엔 커다란 참나무가 빽빽해 굵은 줄기가 좀 칙칙하다 싶었는데 오를수록 잔가지마다 잎눈이 풋풋하게 돋아난 게 여간 싱그럽지 않다.

회갈색을 바탕으로 하여 연하디연한 연두색으로 한껏 점묘의 기교를 부린 숲 속은 멋들어진 신인상파 그림이다.

갈참나무 둥치들 사이로 진달래의 붉은 색이 언뜻언뜻 비치더니 중턱으로 올라가며 화풍은 어느새 유화로 바뀐다.

연분홍.빨강 물감을 듬뿍 찍어 능선의 왼쪽 오른쪽이며 앞뒤에다 척척 발라 진달래 꽃밭을 만들었다.

우중충하다 싶은 높직한 바위에는 틈틈이 붉디붉은 진홍색을 골라 탐스러운 꽃부리들을 선명하게 그려 넣었다.

화폭 오른쪽을 유심히 보면 울긋불긋한 사이로 상아 같은 인수봉이 우뚝하고 성곽 같은 만경대 능선이 기다란데, 여느 때는 탄성을 자아내는 장관이 지금은 눈길조차 끌지 못한다.

그저 무채색의 바탕 그림일 뿐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을 꽃불이라 하던가.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불길이 지나가는 아가씨의 가슴에 옮겨 붙었는지 고운 볼이 홍염하기 그지없다.

젊음은 꽃처럼 자연스럽다.

"저기 봐라. 너무 예쁘지. 꼭 네 얼굴 닮았네. "

"정말?"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나선 주름살진 아줌마와 할머니도 명화를 완성하는 데 한 몫 한다.

대동문에 가까워지자 북한산 화랑은 또 다른 모습이다. 간간이 생강나무 노란 꽃이 오물오물 피어 있지만 다른 나뭇가지엔 아직 연두색 점묘도 하지 않았다.

진달래는 가지 끝에 콕콕 점을 찍긴 했으나 그릴 자리만 표시해 놓은 밑그림이다.

얼굴에 살가운 햇살이 바로 파스텔화며 유화며 점묘화를 그려내는 조물주의 화필이지 싶다.

이 자연의 화폭에 나는 지금 어떤 자국으로 담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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